깟짜야나곳따 경 (SN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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깟짜야나곳따 경 (SN 12:15)
  • /소치 김승석 엮음
  • 승인 2013.09.07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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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 머무셨다.

2. 그때 깟짜야나곳따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깟짜야나곳따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3. “세존이시여, ‘바른 견해[正見], 바른 견해’라고들 합니다. 세존이시여, 바른 견해는 어떻게 해서 있게 됩니까?”

4. “깟짜야나여, 이 세상은 대부분 두 가지를 의지하고 있나니, 그것은 있다는 관념과 없다는 관념이다. 깟짜야나여, 세상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해 없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깟짜야나여, 세상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해 있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

5. “깟짜야나여, 세상은 대부분 갈애와 사견으로 인해 집착과 취착과 천착에 묶여 있다. 그러나 바른 견해를 가진 성스러운 제자는 마음이 머무는 곳이요 잠재하는 곳인 그러한 집착과 취착을 ‘나의 자아’라고 가까이 하지 않고 취착하지 않고 고수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괴로움이 일어날 뿐이고, 단지 괴로움이 소멸할 뿐이다.’라는 데 대해서 의문을 가지지 않고 의심하지 않는다. 여기에 대한 그의 지혜는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 깟짜야나여, 이렇게 해서 바른 견해가 있게 된다.”

6. “깟짜야나여, ‘모든 것이 있다.’는 이것이 하나의 극단이고, ‘모든 것이 없다.’는 이것이 두 번째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이런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중간에 의해서 여래는 법을 설한다.”



《해설》



본경에서 나오는 깟짜야나곳따 존자는 우리에게 가전연 존자로 잘 알려진 마하깟짜나 존자와는 다른 분입니다.

인간은 견해의 동물입니다. 일체 중생은 매 찰나 대상과의 연기적 관계 속에서 수많은 인식,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런 인식, 생각은 항상 견해, 또는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2600여 년 전의 부처님 재세 시에도 인도에는 62가지(과거 18 + 미래 44) 견해가 있었습니다. 이런 견해의 문제에 대하여 고뇌를 누구보다 많이 하신 분이 바로 세존이십니다.

그 62가지 견해 중, 이 형성된 세상(상카라 - 로카)과 자아(영혼)가 영속한다고 보거나[常見], 또는 단멸한다고 보는 견해[斷見]가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전자에 집착하면 영원주의에 빠지고, 후자에 집착하면 허무주의에 빠지는데, 세존께서는 본경에서 전자를 ‘있다는 관념’으로, 후자를 ‘없다는 관념’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이 모든 세상은 있고 항상 존재한다.”는 관념, 이와 달리 “이 모든 세상은 없고 단멸한다.”는 관념은 모두 삿된 견해로서, 유위법(有爲法)들에 대하여 있다거나 없다는 유무(有無)의 관점에서 관찰하여서는 아니 되고, 제법(諸法)의 일어남과 사라짐의 입장에서 관찰하여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서 제법이라 함은 ‘지금 여기’ 매순간(찰나) 내안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물심현상, 즉 몸과 마음의 작용을 뜻합니다. 이처럼 찰나(순간)와 조건에 눈을 떠야 비로소 위빠사나를 시작한 자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고 「청정도론」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과 제법을 찰나(刹那) 생멸(生滅)의 상속(흐름)으로 보지 않으면, 있다거나 없다는 유(有)의 상견이나 무(無)의 단견에 빠질 수 있습니다. 찰나(순간)와 조건에 사무칠 수 있다면, 찰나생이기 때문에 단멸론이 아니고 찰나멸이기 때문에 상주론이 아니라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세존께서는 동틀 무렵 중생을 위한 자비심에서 12연기의 순관(順觀)과 역관(逆觀)을 하시고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하셨습니다. 본경에서 세존께서 설하신 ‘세상의 일어남’이라 함은 순관을 통한 괴로움의 조건적 발생의 법칙을, 그 반면에 ‘세상의 소멸’이라 함은 역관을 통한 괴로움의 조건적 소멸의 법칙을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의 가르침은 윤회 과정에서 개인의 정체성을 유지시켜주는 ‘참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연기법의 존재로서 인간은 3차원 형상의 세계에서 대상을 지각하고 그에 대한 느낌이 생기면서 ‘자아’라는 환상을 갖게 될 뿐입니다. 그러나 이는 존재론적 관념에 불과하고 실상이 아닙니다.

본경에서 세존께서는 연기법을 아는 것이 바른 견해임을 명쾌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제행무상, 제법무아‘란 연기법의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그래서 “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담마)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는 부처를 본다.”라는 불법(佛法)이 나온 것입니다.

연기를 깨닫는 실천적, 수행적 측면이 팔정도이고 이를 중도(中道)라 합니다. 용수보살께서는 “중생들의 소견은 두 가지 있으니 상견과 단견이다. 이를 중도라 부르지 않는다. 상견도 없고 단견도 없는, 즉 연기를 관찰하는 지혜, 이를 불성(佛性)이라 한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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