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경 (SN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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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경 (SN 1:21)
  • /유현 김승석 엮음
  • 승인 2015.03.13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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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 머무셨다. 그때 어떤 천신이 밤이 아주 깊었을 때 세존께 다가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서서 세존의 면전에서 이 게송을 읊었다.



[천신]

“칼이 내려 꽂혀오는 것처럼, 머리에 불붙은 것처럼

감각적 욕망을 버리기 위해

비구는 알아차려[正念] 유행해야 합니다.“



[세존]

“칼이 내려 꽂혀오는 것처럼, 머리에 불붙은 것처럼

불변하는 자신이 존재하는 견해[有身見]을 버리기 위해

비구는 알아차려[正念] 유행해야 하노라.“



【해설】



어떤 천신이 사왓티(사위성)에 계신 세존을 찾아와서 법담을 나누며 출가사문은 감각적 욕망을 버리기 위해서 ‘칼이 내려 꽂혀오는 것처럼, 머리에 불붙은 것처럼’ 소욕(小欲)과 지족(知足)의 수행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이 천신의 비유가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하시고 그 천신을 첫 번째 도(道)인 예류도에 대한 가르침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본 게송을 읊으시고 교화하셨다고 주석서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세속적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헐떡거리지만 불만족하고 불충분하다는 생각과 느낌을 갖습니다. 또한 감각적 욕망의 추구라는 것은 무상해서 얼마못가 고통으로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고대 인도인들은 그 치유책으로 감관을 고요하게 하는 삼매(사마타)수행을 하였고, 그 공덕으로 사후에 색계의 범천으로 태어나기를 기원하였습니다.

부처님 재세시의 인도에서 바라문들이나 외도수행자들이 선정의 여러 단계에서 얻어지는 적정(寂靜)과 법열을 이루었으나 자아라는 것을 붙잡고 거기 매달리려는 그들의 욕구는 아직도 남아 있어서 출세간(해탈)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세존께서도 몸소 사마타수행의 최고 높은 경지까지 증득하였습니다. 하지만 단지 삼매에 들어 감각적 욕망의 억압함을 통해서 탐욕을 버리더라도 삼매에서 나오면[出定], 다시 일어나기 때문에 이는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에 불과하고 삼매에 의해 억압된 감각적 욕망은 완전히 뿌리 뽑히지 않는다고 알고 보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아라는 틀을 지어 그 안에 들어앉은 삶’에서는 불만족 또는 고통을 피할 수 없음을 아시고 출세간, 즉 해탈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 첫 번째 이정표로서 ‘불변하는 자신이 존재하는 견해[有身見]’을 버리기 위해 출가사문은 ‘칼이 내려 꽂혀오는 것처럼, 머리에 불붙은 것처럼’ 용맹정진의 수행을 하여야 한다고 경책하신 것입니다.

유신견이라 함은 자아에 대한 믿음, 즉 몸과 마음을 나 자신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미망에 가려 몸과 마음[名色]의 참 본성을 모르는 까닭에 깊이 생각해 볼 여유도 없이 몸과 마음을 자아로 간주합니다. 이 몸과 마음은 ‘나’이고, 나의 것이고, 나의 자아라고 믿는 이런 원초적 관념은 아주 단단히 뿌리 박혀 있는데, 세존께서는 자아(ego)가 모든 중생을 세속에 얽어매고 세간에 가두어 넣는 첫 번째 족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벨상 수상자인 이클즈(Eccles) 박사가 뇌에 관한 그의 저술에서 아주 어린 시절의 성격형성기에 뇌 속에 인상지어진 사고형태가 전 생애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해냈습니다. 그에 따르면 영원불변의 영혼 관념이 마음의 심층에 각인되었다면 이것을 제거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자아’란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오온(五蘊)들을 두고 나라거나 내 것이라고 취착한 것에 불과합니다. 사람이나 인간이란 이러한 오온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서로 부딪혀서 만들어내는 물안개와 물보라와 같은 개념적 존재일 뿐입니다.

자아가 없다는 말은 아무 것도 없는 허무주의와는 다릅니다. 연기적 세계관으로 세상, 오온을 통찰할 때, 즉 법들이 생겨나는 조건들을 통찰하는 지혜가 일어날 때 자아의 개념을 부수고 공(空)해탈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요즘 한국불교에서 ‘참 자아’ 또는 ‘참나’라는 개념을 흔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개념은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바가 아니므로 비불교적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불교교리의 가장 기본적 특징을 이루는 무아(無我)사상과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른 종교나 재가불자들이 오해를 살 수 있는 불교 용어의 취사선택에는 신중함이 있어야 합니다.

선정, 삼매, 신통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자아라는 개념을 해체하지 못하는 한 그런 수행자는 성자의 반열에 들어갈 수 없거니와 해탈, 열반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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