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梵住](DN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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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梵住](DN13)
  • /유현 김승석 엮음
  • 승인 2015.06.04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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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500명 정도의 많은 비구 승가와 함께 마나사까따라는 꼬살라의 바라문 마을의 북쪽에 있는 아찌라와띠 강 언덕의 망고 숲에 머무셨다.

2. 그때 와셋타 바라문 학도가 산책을 나와서 이리저리 포행하며 다니다가 세존께 다가가서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사문 ‘고따마 존자께서는 범천의 일원이 되는 길을 설하신다.’라고 들었습니다. 고따마 존자께서 제게 범천의 일원이 되는 길을 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3. “와셋타여, 그렇다면 들어라. 마음에 잘 새겨라. 나는 설하리라.” “그러겠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라고 와셋타 바라문 학도는 응답했다.“

4.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는 자애[慈]가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東]을 가득 채우면서 머문다. 그처럼 두 번째 방향[西]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南]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北]을,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주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모든 세상을 풍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고통 없는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가득 채우고 머문다.”

5. “다시 와셋타여, 비구는 연민[悲]이 함께한 마음으로 … 같이 기뻐함[喜]이 함께한 마음으로 … 평온[捨]이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東]을 가득 채우면서 머문다. 그처럼 두 번째 방향[西]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南]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北]을,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주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모든 세상을 풍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고통 없는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가득 채우고 머문다.”

6. “와셋타여, 예를 들면 고동을 부는 자가 함이 세면 별 어려움 없이 사방에서 다 들을 수 있게 하는 것과 같다. 와셋타여, 그와 마찬가지로 이처럼 평온을 통한 마음의 해탈을 닦은 자에게 제한된 욕계(欲界)의 업은 여기에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고 여기에 더 이상 정체해 있지 않는다. 와셋타여, 이것도 범천(梵天)의 일원이 되는 길이다.”



【해설】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梵住]는 『디가 니까야(장부)』의「삼명 경(DN13)」에 나타난 자애관 수행의 전형적인 정형구입니다. 초기경의 여러 곳에 나타난 마음 수행법의 대부분이 자신의 의식을 내면으로 향하는데 비해서, 이 자애관은 의식을 밖으로, 외부 세계로 그리고 외부 존재들에게 투사한다는 점에 그 특징아 있습니다.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은 색계 혹은 무색계의 삼매의 경지에 속하는 욕계를 벗어난 무량한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아비담마나 대승에서는 이를 사무량심(四無量心)이라 부릅니다.

사무량심은 자비희사(慈悲喜捨)라고 하는데, 자애는 자기뿐만 아니라 일체의 존재들의 안전과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고, 연민은 동정심으로 다른 존재들의 고통을 제거해 주려는 마음이고, 같이 기뻐함[喜]은 남의 행복을 자기 것처럼 즐겨 나누어 가지는 마음이며, 평온[捨]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완전하고도 요지부동한 균형을 이룬 마음을 뜻합니다.

자애수행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냄의 위험과 인욕의 이익을 반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초기경의 여러 곳에서 발심 수행자들이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慈心解脫]을 계발하고, 닦고, 많이 공부 짓고, 수레로 삼고, 기초로 삼고, 확립하고, 굳건히 하고, 부지런히 닦으면 열한 가지 이익이 기대된다고 설하셨습니다. 그 열한 가지란 “편안하게 잠들고, 편안하게 깨어나고, 악몽을 꾸지 않고, 사람들이 좋아하고, 비인간들이 좋아하고, 신들이 보호하고, 불이나 독이나 무기가 그를 해치지 못하고, 빨리 마음이 삼매에 들고, 안색이 좋아 지고, 최상의 경지(=아라한)를 통찰하지 못하더라도 죽어서 범천(Brahma)의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자애가 충만할 때 선정을 방해하는 다섯 가지 장애[五蓋]로부터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특히 성냄에 얽매이는 것으로부터 해탈케 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일러 마음의 해탈[慈心解脫]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이 수행법의 영역에 들어오게 되면 이는 깨달음을 실현하는 위빠사나의 기초가 되는 강한 힘을 낳는 토대가 됩니다.

『청정도론』에서는 자비관을 시작할 때 먼저 자신을 향해 자애를 거듭 거듭 닦아야 하고, 자신을 자애로 가득 채우고 난 뒤 다음 사람에게, 즉 아주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사람, 무관한 사람, 원한 맺힌 사람의 순서대로 그 대상을 영상화 혹은 관상하는 방법으로 확대해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좌선에 들어 먼저 자신을 대상으로 하여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면서 "나 자신이 행복하기를", "나 자신이 기쁨으로 가득하기를". "나 자신이 평화롭기를" 기원할 때 행복한 느낌이 일어나고 또 따뜻하고 훈훈하다는 느낌이 일어 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한량없는 자애심을 가족, 친구, 직장동료에게 방사하고, 이 지구촌의 모든 존재들에게도 방사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사무량심을 기원하고 투사할 때마다, 수행자는 그들을 치료하고 평화와 행복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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