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선 법사의 인도 성지순례기<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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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선 법사의 인도 성지순례기<中>
  • 유지선 법사(선재학교 교장)
  • 승인 2005.05.16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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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과 초전법륜의 성지 보드가야·샤르나트 편

보리수 아래 붓다와 마주 앉는다

성불기려 보드가야에 마하보디사원 세워

샤르나트는 최초로 ‘삼보’가 이뤄진 성소



   
 
   
 
2,600년 전, 샤카 족의 왕자로 태어난 고오타마는 생노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깨달음을 얻는 고행자가 된다. 하지만 극도의 괴로움과 즐거움도 깨달음을 얻는 것에는 도움이 되지 못함을 깨닫고, 고오타마는 커다란 보리수 아래에서 깊은 명상에 잠기게 된다. 시간을 잊은 명상 속에서 길고 어두운 밤이 걷히고 먼동이 터 올 무렵, 고오타마는 큰 깨달음을 얻는다.

순간 세상의 의혹이 모두 풀리며 ‘인간은 왜 존재하며, 또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생노병사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된다. 깨달음을 얻은 고오타마는 마침내 ‘붓다’가 되었다. 이 때 진리의 기쁨에 쌓인 붓다를 지켜본 것은 말없는 보리수와 미명의 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새벽 별뿐이었다. 붓다의 성도를 기념하기 위해 불자들은 이 곳에 커다란 탑 모양의 사원을 세웠다.

마하보디사원으로 불리는 이 사원 뒤에는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자리 ‘금강보좌’가 남아 있고, 붓다의 성도를 증명이라도 하듯 보리수가 금강보좌를 감싸고 있다. 하지만 붓다 당시의 성스런 보리수는 이교도에 의해 베어지고 뿌리까지 불태워져 아쉽게도 전하질 않는다. 하지만, 아쇼카 왕의 딸 ‘상가미타’가 스리랑카로 시집갈 때 이 곳 보드가야의 보리수 가지를 가져다 심었는데, 그 때의 보리수가 자라 스리랑카의 가장 성스런 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이 나무의 가지를 19세기에 다시 잘라다 옮겨 심은 것이 지금의 보리수인데 지금의 보리수는 붓다 당시의 보리수 손자뻘쯤 되는 셈이다.

   
 
   
 
1,400년 전의 보리수에 관한 현장스님의 ‘대당서역기’기록이다.

‘금강좌 위의 보리수란 핍팔라 나무가 있다. 옛날 붓다가 이 땅에 계실 때는 높이가 수 백 척이었으나, 가끔씩 벌채 당했음에도 아직도 높이는 4∼5장은 된다. 붓다가 그 아래에 앉아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이를 보리수라 한다. 줄기는 황백색이고 가지와 잎은 푸른데 겨울이나 여름이나 잎이 떨어지는 법이 없고 윤이 난다. 왕이나 여러 곳의 승려, 속인 등 수천만 명이 모여들어 향수나 향유를 붓는다. 그리하여 음악을 연주하고 향회를 벌여 놓고 등불을 켜고서 밤낮이 없이 다투어 공양을 드린다.’

겨울(건기)에 해당하는 1월에는 보드가야에 달라이라마께서 주관하는 ‘평화를 위한 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티벳 불자들은 물론 수만명의 세계 각국의 불자들이 모여들어 그야말로 야단법석을 이룬다.

7세기에 이 곳을 순례한 현장스님은 ‘대당서역기’에 마하보디사원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정사의 본래의 땅에는 야쇼카 왕이 먼저 작은 정사를 세웠는데, 나중에 어떤 바라문이 그를 한층 넓혀 지금의 것으로 세웠다. 보리수 북문 밖에 마하보디사원이 있는데, 뜰과 건물은 6개의 건조물로 되어 있고, 전망이 좋은 누각은 4층으로 되어 있다.’ 기원 전 254년 전륜성왕 아쇼카 왕에 의해 처음 창건되었지만, 여러 번 증·개축되었고, 현재의 모습은 훨씬 후대에 이루어 졌음을 짐작케 한다. 한때 마하보디사원이 인도인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버마(미얀마)의 왕과 불자들에 의해 14세기경까지 보수가 되어왔다.

   
 
   
 
사원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833년 영국의 고고학자 ‘커닝햄’에 의해 재발굴되면서부터다. 다시 1956년 붓다의 열반 2,500주년을 기념해 인도정부의 대폭적인 수리와 복원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2002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면서 룸비니와 더불어 세계인이 보호하는 성지가 되었다.

붓다께서는 보드가야에서 6년 동안의 극심한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으신 후, 북서쪽으로 250㎞ 떨어진 샤르나트까지 11일이나 홀로 걸어오셨다. 보드가야의 우루벨라에서 함께 고행을 하던 5명의 수행자를 만나 첫 설법을 펴기 위해서였다. 이 5명의 수행자들은 붓다께서 네란자라 강변에서 고행을 그만두고 수자타의 유미죽 공양을 받자, “그는 타락했다”며 비난하며 떠나 버렸다. 멀리서 붓다를 알아본 이들은 붓다를 아는 척도 하지 않을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붓다께서 가까이 다가오자, 다섯 수행자는 붓다의 얼굴에 나타난 평화로운 표정을 보고는 차례로 자리에 일어나 붓다를 맞이하여 붓다의 말씀을 듣게 된다. 붓다의 첫 설법을 들은 5명의 수행자는 모두 깨달아 아라한이 된다. 붓다와 붓다의 가르침 그리고 붓다를 따르는 수행자가 처음으로 형성되면서 샤르나트는 최초로 삼보가 이루어진 곳이 되었다.

불교의 초전법륜지 샤르나트는 인도 최고의 성지 ‘바라나시’에서 북동쪽으로 약 9Km 정도 떨어져있다. 일설에는 브라흐닷타 왕이 이곳에 사슴들이 살도록 풀어놓았기 때문에 ‘사슴의 동산(鹿野苑)’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샤르나트의 승원을 대규모로 복원한 것은 12세기 초반으로 ‘쿠마레데비’에 의해 굽타시대의 모습대로 복원된다. 물론 현재는 그때의 모습도 자취를 감추고 없다. 다만 그 보다 훨씬 이전인 1,400여년전의 기록인 ‘대당 서역기’를 통해 그 때의 모습을 그려 볼 뿐이다.

   
 
   
 
‘바라나시로부터 강을 건너 동북쪽으로 10여 리를 가면 녹야가람이 있다. 건물은 하늘 높이 솟아 있고, 사방으로 긴 복도가 이어져 있다. 이 곳에는 1,500명의 스님들이 살고 있으며, 소승정량부(小乘正量部)를 배우고 있다. 가람 안에 절이 있는데, 높이가 100여척, 바깥쪽 계단은 돌로 만들어졌고, 불단은 벽돌로 만들었으며, 백 층이 넘는데 모두 황금불상을 부조해 놓았다.

정사 안에는 유적의 불상이 있는데 그 크기는 여래의 몸과 같고, 법륜을 전하는 설법 자세를 취하고 있다.’ 공원 같기만 한 지금의 모습으로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지만, 현장 스님이 샤르나트를 방문했을 때만해도 많은 스님들이 수행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샤르나트에는 5비구와 붓다가 샤르나트에서 만난 것을 기념해 세운 차우간디 수트파(영불탑)와 붓다의 초전법륜을 기념해 세운 ‘다르마 라지카 수트파’ 터와 두 번째 법문과 미륵 보살에게 수기를 준 것을 기념해 세웠다는 ‘다메크 수트파’. 아쇼카 대왕이 세운 석주가 남아 있으며, 샤르나트의 유적을 전시 중인 샤르나트 박물관에는 인도의 국장(國章)인 사자 석상과 5세기 굽타시대에 조성된 초전법륜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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