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법문<대효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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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법문<대효스님>
  • 제주불교
  • 승인 2005.05.16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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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명선원 선원장 대효스님

대효스님은 경상북도 문경 김룡사에서 백양사 고불총림 방장을 지내신 故서옹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이후 서옹스님을 가까이서 오랫동안 시봉한 스님은 이후 성철스님, 서암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 문하에서 수행정진했다. 또 해인사 등 전국의 제방선원에서 선수행에 전념해오다 제주의 원명선원으로 자리를 옮겨 1982년에 불교유치원을 설립하는 등 포교에도 열정을 쏟고 있다. 또 대효스님은 1976년부터 현재까지 30여년 세월을 거르지 않고 매년 여름과 겨울 ‘삼매체험 선 수련회’를 열고 있고, 참선대학인 ‘선불장(選佛場)을 운영하여 깨달음을 생활로 실천하며 사는 생활속의 참선을 가르치고 있다. 현재 제주원명선원 선원장으로 주석중이며 평화를 위한 제주종교인협의회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혼자 소용없어, 함께 잘 살아야지



   
 
   
 
지금 우리 인류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혼란한 시기에 처해있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크고 작은 집단, 집단과 집단사이에 심각한 갈등과 대립 분열 살상 파괴의 격랑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대상으로 인간과 자연, 동물, 개발과 환경 등등….

우리 사회가 개개인과 모두가 함께 거센 소용돌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원인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는다면 우리 인류는 파국으로가 마침내 종말을 면치 못하고 자멸하고 말 것이다.

자신만을 위해 산다는 것이 잘못된 것 인줄 모른다면 세상을 잘 못살아도 너무 잘못 사는 것이다.

남을 배려하고 남을 위하면 그것이 곧바로 자신에게 돌아온다. 남을 위하는 것이 곧 자신을 위하는 것이다. 남을 위하면 남에게만 위하는 것으로 알기 쉽지만 나까지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남이 곧 자신의 일부와 같다.

친구를 위하면 나와 친구가 잘되고, 자식이 아버지를 인정하고 부모가 잘되면 부자(父子)가 잘 되는 것이고, 남편이 아내를 배려하고 아내가 잘되면 부부(夫婦)가 잘되는 것이고, 형이 아우를 보살피고 이끌어주면 형제가 잘된다. 스승이 제자를 잘 가르치면 사제가 드날려 국가와 인류의 앞날이 밝을 것이고, 전투에서 지휘관이 부하장졸을 잘 다스리고 연마시켜 국난을 평정하면 지휘관과 장졸을 포함한 온 나라가 함께 편안할 것이며, 관리가 민원을 공과 사를 혼동하지 않고 처리하고 자신의 일같이 소중하게 보살피는 태도는 지방이나 국가의 복리증진으로 이어질 것이다. 원수와 친한 이가 서로 사랑하면 원친(怨親)이 하나 되어 평화가 깃든다.

나와 너는 우리의 몫을 각각 맡아 우리를 지탱한다. 우리를 지탱하는 나나 네 가운데 한사람이 잘못되면 우리는 함께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개인의 이기나 크고 작은 집단이기에 빠지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이다.

부부상호간에 성격의 격차를 인정하거나 해소하지 못하는데 서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백년가약을 파혼으로 막을 내리는 가정이 늘고 있다. 이혼은 가정 붕괴요 가정 붕괴는 사회 붕괴로 이어진다.

최근 우리 사회에 일고 있는 개발논리와 환경보존 문제가 그렇다. 따로 떼 놓고 보기 때문에 접근하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리며 국력은 누수되고 있다.

암울한 사회에서 권위주의와 철권통치가 지배하던 시대에 어느 일방이 주도하고 이를 추종하던 사회의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의 지배논리에서 성립되었던 체제, 일방을 강요하고 그 강요가 받아들여지던 풍토는 함께 사는 사회의 걸림돌이다.

함께 사는 사회는 하나로 볼 때 가능해진다. 하나를 나누면 산술적 셈법으로는 반반이 되지만, 하나를 가지고 싸우다가 놓쳐버리기라도 하면 나눌 것도 없어진다.

도둑의 무리들이 탈취한 거대한 보물을 여러 도둑과 같이 분배하기로 한 약속을 배신하고 욕심에 눈이 멀어 서로 다 차지하기 위해 결투가 벌어지고 여기에서 도둑들은 모두 죽고 보물은 다시 원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된다. 도둑들은 욕심 때문에 함께 나누지 못하고 모두 죽고 만다.

자기 것을 양보하고 기득권을 더불어 나누면 함께 누릴 수 있다. 기득권 포기는 함께 가는 자양분이다.

더불어 사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시대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항상 기득권 경쟁과 지키기에 있었다. 더불어 살기 위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가장 주요한 덕목이다.

부부와 남녀사이에서 어느 한쪽의 군림이 용인되기 위해서는 상대가 수용할 때 가능하다. 그러나 내가 존립하는 것은 상대에 의해서 성립이 된다.

노동자와 사용자간의 문제는 그네들만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국가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는가. 사회전반의 문제요 국가적 대사다. 노동자의 생계에 국한되지 않고 사용자의 경영에 그치지 않는다. 노사가 이해관계의 차원에서 풀려고 한다면 꼬인 실타래는 풀리지 않는다.

원수가 잘되기를 기도하자. 나를 원망하고 나를 꾸짖는 이를 귀담아듣고 스승과 같이 존중하면 자신은 성숙하고 어려운 사업은 번영할 것이다.

내가 이루지 못한다고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원수가 그릇되게 판단하여 잘못된 길을 가지 않도록 버려 두지 말아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화는 나에게 미칠 것이다.

내가 명성을 갖고자할 것이 아니라 경쟁상대에게 돌려주면 근심이 사라지고 상대는 나를 꺼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높은 지위에 올라 해야 할 일을 상대에게 지위가 돌아가면, 상대가 내가 할 일을 해주게되니 나의 할 일을 덜어 주게 되고, 더불어 만족하고 나란히 평화를 누리게 된다.

이와 같이 보는 것이 함께 나누며 사는 삶이며 상생이며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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