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큰스님 사자후를 하소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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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큰스님 사자후를 하소서<1>
  • 제주불교
  • 승인 2005.05.23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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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 망상 벗어난 무심이 부처다



[래 한국불교의 많은 어른 스님들이 우리 곁을 떠났다. 육신이라는 낡은 옷을 벗어 던지고 입적하는 순간까지도 초연한 선사들의 모습은 범부중생들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침으로 남겼다. 제주불교신문은 죽음이 단순한 육체의 소멸이 아닌 생사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과 적멸의 순간임을 전하고자 했던 우리 시대 선지식들의 사자후를 다시 청해 듣는 코너를 격주로 마련했다.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편집자>



<이 법문은 해인사총림 방장으로 주석하고 계시던 1982년 음력 4월 30일에 설하신 ‘무심이 부처다’란 주제의 대중법어입니다. 성철스님 법어집 1집 7권 ‘자기를 바로 봅시다’에 실려 있는 이 법문을 요약해 지면에 싣습니다.>



   
 
   
 
불교라고 하면 부처님이 근본입니다. “어떤 것이 부처냐”하고 묻는다면 여러 가지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부처라는 그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기는 좀 곤란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근본 원리 원칙을 생각한다면 곤란할 것도 없습니다.

모든 번뇌망상 속에서 생활하는 것을 중생이라 하고 일체의 망상을 떠난 것을 부처라고 합니다. 모든 망상을 떠났으므로 망심이 없는데 이것을 무심(無心)이라고 하고 무념이라고도 합니다. 중생이란 망상 속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중생이라는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저 미물인 곤충에서부터 시작해서 사람을 비롯하여 십지등각(十地等覺)까지 모두가 중생입니다. 참다운 무심은 오직 제8 아라야 근본무명까지 완전히 끊은 구경각(究竟覺) 즉 묘각(妙覺)만이 참다운 무심입니다. 이것을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망상 속에서 사는 것을 중생이라고 하니 망상이 어떤 것인지 좀 알아야 되겠습니다. 보통 팔만 사천 번뇌망상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구분하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의식(意識)입니다. ‘생각이 왔다 갔다, 일어났다 없어졌다’하는 이것이 의식입니다. 둘째는 무의식(無意識)입니다. 무의식이란 의식을 떠난 아주 미세한 망상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의식을 제6식(第六識)이라 하고 무의식을 제8식(第八識:아라야식)이라고 하는데, 이 무의식은 참으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8지보살도 자기가 망상 속에 있는 것을 모르고 아라한(阿羅漢)도 망상 속에 있는 것을 모르며 오직 성불(成佛)한 분이라야만 근본 미세 망상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곤충 미물에서 시작해서 십지, 등각까지 전체가 망상 속에서 사는데, 7지보살까지는 의식 속에 살고 8지 이상, 10지, 등각까지는 무의식 속에서 삽니다. 의식세계든 무의식세계든지 전부 유념(有念)인 동시에 모든 것이 망상입니다. 그러므로 제8 아라야 망상까지 완전히 끊어 버리면 그때가 구경각이며, 묘각이며, 무심입니다.

무심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것은 거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본래의 마음자리를 흔히 거울에 비유합니다. 거울은 언제든지 항상 밝아 있습니다. 거기에 먼지가 쌓이면 거울의 환한 빛은 사라지고 깜깜해서 아무것도 비추지 못합니다. 망상은 맑은 거울 위의 먼지와 마찬가지이고, 무심이란 것은 거울 자체와 같습니다. 이 거울 자체를 불성(佛性)이니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니 하는 것입니다. 모든 망상을 다 버린다는 말은 모든 먼지를 다 닦아낸다는 말입니다. 거울에 끼인 먼지를 다 닦아내면 환한 거울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동시에 말할 수 없이 맑고 밝은 광명이 나타나서 일체 만물을 다 비춥니다. 우리 마음도 이것과 똑같습니다.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고 제8 아라야식까지 완전히 떨어지면 크나큰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구름 속의 태양과 같습니다. 구름 다 걷히면 태양이 드러나고 광명이 온 세계를 다 비춥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도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면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서 시방법계(十方法界)를 비추인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일체 망상이 모두 떨어지는 것을 ‘적(寂)’이라 하고, 동시에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는데 이것을 ‘조(照)’라고 합니다. 이것을 적조(寂照) 혹은 적광(寂光)이라고 하는데, 고요하면서 광명이 비치고 광명이 비치면서 고요하다는 말입니다.

또 무심은 바꾸어 말하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불생이란 일체 망상이 다 떨어졌다는 말이고, 불멸이란 대지혜 광명이 나타난다는 말이니, 즉 불생이란 적(寂)이고 불멸이란 조(照)입니다. 그러니 불생불멸이 무심입니다.

무심을 경(經)에서는 정혜(定慧)라고도 합니다. 정(定)이란 일체 망상이 모두 없어진 것을 말하고, 혜(慧)라는 것은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정혜등지(定慧等持)를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이 무심을 완전히 성취하면 또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성불(成佛)인 동시에 열반인 것입니다. 육조(六祖)스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무상 대열반이여! 두렷이 밝아 항상 고요히 비추는도다.(無上大涅槃 圓明常寂照)’

흔히 사람이 죽는 것을 열반이라고 하는데, 죽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은 열반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면서 동시에 광명이 온 법계를 비추는 적조가 완전히 구비되어야 참다운 열반입니다. 고요함(寂)만 있고 비춤(照)이 없는 것은 불교가 아니고 외도(外道)입니다. 일체 망상을 떠나서 참으로 견성(見性)을 하고 열반을 성취하면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대자유인이 되는데, 이것을 해탈(解脫)이라고 합니다.

해탈이란 결국 ‘기신론(起信論)’에서 간단히 요약해서 말씀한 대로 “일체 번뇌망상을 다 벗어나서 구경락인 대지혜 광명을 얻는다(離一切苦 得究竟樂)” 이 말입니다.

이상으로써 성불이 무엇인지 무심이 어떤 것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참으로 불교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 근본이 성불에 있는 만큼 실제로 적조를 내용으로 하는 무심을 실증(實證)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능력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능력이 없는 것인가? 근본은 누구든지 다 평등합니다. 평등할 뿐만 아니라 내가 항상 말하듯이 중생이 본래 부처이지,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명경을 예로 들면, 아무리 깨끗한 명경이라도 먼지가 앉을 것 같으면 명경이 제 구실을 못합니다. 그러나 본래의 명경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먼지가 앉아 있어서 모든 것을 비추지 못한다는 것뿐이지 명경에는 조금도 손실이 없습니다. 먼지만 싹 닦아 버리면 본래의 명경 그대로 아닙니까? 그래서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은 명경이 본래 깨끗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자성(自性)이 본래 청정한데 어찌해서 중생이 되었나? 먼지가 앉아 명경의 광명을 가려 버려서 그런 것뿐이지 명경이 부서진 것도 아니고 흠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 다만 먼지가 앉아서 명경이 작용을 완전하게 못 한다 그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참다운 명경을 구하려면 다시 새로운 명경을 만드는 게 아니고 먼지 낀 거울을 회복시키면 되는 것처럼 본래의 마음만 바로 찾으면 그만입니다.

내가 항상 “자기를 바로 봅시다”하고 말하는데, 먼지를 완전히 닦아 버리고 본래 명경만 드러나면 자기를 바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라고 할 때 마음의 눈이란 것도 결국 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표현이 천 가지 만 가지 다르다고 해도 내용은 일체가 똑같습니다.

내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불교에는 부처님이 근본인데 부처님이란 무심이란 말입니다. 모든 망상 속에 사는 것을 중생이라 하고 일체 망상을 벗어난 무심경계를 부처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무심이 근본이니만큼 불교를 내놓고는 어떤 종교, 어떤 철학도 망상 속에서 말하는 것이지 무심을 성취해서 말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을 혼돈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만큼 불교란 것은 어떤 철학이나 어떤 종교도 따라올 수 없는 참으로 특출하고 독특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망상 속에서 하는 것하고 망상을 완전히 떠난 것하고를 비교해서 생각해 봅시다. 다시 명경의 비유를 들겠습니다. 명경에 먼지가 앉으면 모든 것을 바로 비추지 못합니다. 먼지를 안 닦고 때가 앉아 있으면 무슨 물건을 어떻게 바로 비출 수 있겠습니까? 모든 물건을 바로 비추려면 먼지를 깨끗이 닦아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망상 속에서는 모든 사리(事理), 모든 원리, 모든 진리를 바로 볼 수 없습니다. 망상이 눈을 가려서 바로 볼 수 없습니다. 모든 진리를 알려면 망상을 벗어나서 무심을 증(證)하기 이전에는 절대로 바로 알 수 없습니다.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하여 무심을 완전히 증득한 부처님 경계 이외에는 전부 다 삿된 지식이요, 삿된 견해(邪知邪見)입니다. 대신에 모든 번뇌망상을 완전히 떠나서 참다운 무심을 증득한 곳, 즉 먼지를 다 닦아낸 깨끗한 명경은 무엇이든지 바로 비추고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정지정견(正知正見)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세상의 모든 종교나 철학은 망상 속에서 성립된 것인 만큼 사지사견이지 정지정견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정지정견은 오직 불교 하나뿐입니다.

결국 바로 보지 못하고 바로 알지 못한다고 하면 행동도 바로 못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눈감은 사람이 어떻게 바로 걸을 수 있겠습니까? 먼지 앉은 명경이 어떻게 바로 비출 수 있겠습니까? 망상이 마음을 덮고 있는데 어떻게 바로 알 수 있으며, 어떻게 바로 볼 수 있으며, 바른 행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바른 행동이라 하는 것은 오직 참으로 무심을 증해서 적광적조(寂光寂照)를 증하기 전에는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부처냐? 하고 물었을 때 바로 앉고, 바로 보고, 바로 행하고, 바로 사는 것이 부처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누구나 다 바로 알고 싶고, 바로 보고 싶고, 바로 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캄캄해서 눈감은 봉사가 되어 있는데 어떻게 바로 살 수 있겠습니까?

쉽게 말하자면 바른 생활을 하자는 것이 불교인데 망상 속에서는 바른 생활을 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오직 무심을 증해야만 바른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지등각도 봉사입니다. 왜냐, 부처님께서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십지등각이 저 해를 보는 것은 비단으로 눈을 가리고 해를 보는 것과 같아서, 비단이 아무리 엷어도 해를 못 보는 것은 보통의 중생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십지등각이 사람을 지도하는 것도 봉사가 봉사를 이끄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바로 이끌려면 자기부터 눈을 바로 떠야 하고, 바로 알아, 바로 행동해야 되겠습니다.

불교와 같이 전체적으로 눈을 뜨고 청천백일(靑天白日)같이 천지만물을 여실히 다 보고 말해 놓은 것은 실제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불자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노력해서 실제 무심을 증해야 되겠습니다. 밥 이야기 천날 만날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직접 밥을 떠먹어야지요. 그렇다고 해서 없는 무심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본래 무심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 입장입니다. 내가 자꾸 “중생이 본래 부처다”하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중생들밖에 없는데 중생이 본래 부처란 거짓말이 아닌가?”하고 오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아까 명경의 비유는 좋은 비유가 아닙니까. 먼지가 앉은 중생의 명경이나 먼지가 다 닦인 부처님 명경이나 근본 명경은 똑같습니다.

우리가 ‘성불! 성불!’ 하는 것도 중생이 어떻게 성불하겠느냐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아닙니다. 본래 부처입니다. 그러니 본래면목, 본래의 모습을 복구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란 것을 확실히 자신하고 노력하면 본래 부처가 그대로 드러날 것이니 자기의 본래 모습을 바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화두(話頭)만 부지런히 하여 우리의 참모습인 무심을 실증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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