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제주에 온 유배인과 불교③-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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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획-제주에 온 유배인과 불교③-ⅰ
  • 강석훈 기자
  • 승인 2005.05.23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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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된 조선불교인물은 누구?(ⅰ)

보우·지안 스님

불교중흥의 전법정신 제주땅 곳곳 뿌리내려



   
 
   
 
북제주군 조천읍 조천리에 위치한 평화통일 불사리탑사(회주 도림스님). 도량에 들어서면 높이 33m, 3층 구조의 불사리탑을 비롯, 법화경·관음보살·지장보살·평화통일의 종 사경탑, 석불 등이 웅장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도량 동쪽에는 비 2기가 있는데, 바로 보우스님과 지안스님의 순교비이다. 이 순교비는 조선시대 불교중흥을 위해 헌신하다, 결국 유배지 제주에서 입적했던 두 스님의 전법정신을 잇기 위해 불사리탑사 회주 도림스님의 원력으로 1994년 음력 7월 7일에 건립됐다.

불사리탑사 순교비에는 “억불의 시대 조선 중기에 불교중흥을 위해 애쓰시다 끝내 순교하신 보우대사는 한국불교사에 영원히 꺼질 수 없는 진리의 횃불이시다. 몸을 던져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움으로써 민족정신의 명맥을 이어 오늘이 있도록 하신 육신보살이시다”라고 기록해 놓았다. 또 지안스님에 대해서는 “대사가 순교하시니 3일 동안 한라산이 울고 바닷물이 들끓었으며, 영결식 하던 날 하늘에 무지개가 서고 서기가 빛을 내니 세인들은 성자의 입적이라 하였다. 지금 한국불교의 법맥과 계맥은 모두 환성 지안대사의 맥이다. 칠월 칠석날 순교를 세우니, 무지개가 뻗치고 하룻밤을 사경탑과 순교비가 방광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 ?∼1565년)스님의 정확한 출생연도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허응당집’ 등에 전하는 내용으로 미뤄보면, 1506년에서 1509년 사이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스님은 15세에 금강산 마하연사에서 출가했다. 이후 약 20여 년 간의 행적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금강산·설악산, 함경도 일부지역에서의 수행생활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불교 중흥조로 추앙받고 있는 보우스님. 스님이 불교중흥운동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던 시기는 1548년이다. 스님은 병을 얻어 천보산 회암사의 차안당에 몇 달 동안 머무르게 된다. 그때 봉은사 주지 명곡스님의 청으로 1548년에 봉은사 주지 소임을 맡게 되는데, 이는 당시 시대상황 속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1544년 중종이 죽은 후 즉위한 명종은 나이가 어려 생모인 문정왕후의 섭정이 시작되는데, 불심이 깊었던 왕후에게 도성 인근의 봉은사는 직접적인 연관을 맺을 수 있었던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결국 스님은 봉은사 주지를 시작으로, 1551년 선종판사의 자리까지 겸하면서 문정왕후의 적극적인 지원을 배경으로 불교중흥의 기반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연산군 10년(1504)부터 폐지됐던 선·교 양종이 1551년에 부활되면서 봉은사는 선종의 본사로, 봉선사는 교종의 본사로 지정됐고, 스님은 판선종사도대선사로 임명된다. 같은해 전국 승려들의 도첩제도가 다시 부활, 1552년에는 승과고시가 다시 시행됐다.

그러나 스님의 불교중흥을 위한 노력은 조정 대신들의 상소와 탄핵으로 이어졌는데, 양종이 부활된 후 반년도 못돼 무려 423건의 상소가 쏟아졌고, 스님을 죽이라는 내용도 75계(啓)에 달했다. 이로 인해 스님은 봉은사 주지직을 내놓았지만, 1557년에 왕후의 도움으로 청평사를 중창하고 1560년에 다시 봉은사 주지 소임을 맡게 된다.

이후 스님이 입적하기까지 약 6년간은 그야말로 처절한 투쟁의 연속기였다. 특히 가장 격렬하게 충돌된 사건은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을 옮기는 일이었다. 관료들은 왕후와 스님이 결탁해 천릉(遷陵)을 진행한다고 비난했으며, 결국 천릉이 이뤄지자 스님에 대한 비난이 더욱 거세지게 된다. 그러나 1565년 회암사의 중수를 마치고 무차대회를 성대하게 개최하기도 했던 스님은 같은 해 문정왕후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관료들의 끈질긴 상소와 함께 위기에 놓이게 된다. 결국 명종은 이이가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를 올림에 따라 스님의 유배를 결정했고, 스님이 제주에 이르자 조정의 동정을 간파한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속설에는 애월읍 어도봉에 적소를 마련했다고 한다.

스님의 죽음이 서울에 알려진 것은 10월 15일이었다. 조정의 벼슬아치와 성균관의 유생들은 보우스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노래를 부르며 잔치를 베풀었다. 명종은 마침내 양종을 철폐하고 승과 시험을 없앴으며 도첩제도 폐지하였다. 이렇게 해서 15년 동안 기세를 올렸던 불교 중흥정책은 문정왕후의 죽음과 함께 일거에 무너지고 말았다.

스님이 입적한 후 불교는 다시 암흑기를 맞다가, 임진왜란에서 승군이 참전하면서 다시 꽃을 피우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보우스님의 불교중흥 노력은 암흑기 조선불교의 명맥을 잇고, 장치 중흥의 기틀을 다진 것으로 높이 평가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불교가 정치권력의 억압을 받고 있는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일체론(禪敎一體論)을 주창했던 보우스님의 교법수호와 선풍선양은 고려시대나 신라시대에 활동한 것과 못하지 않은 활약상을 보인 것이다.

보우스님의 저술로는 시와 게송을 모아 놓은 ‘허응당집’을 비롯, 어록 ‘나암잡저’, 염불의 중요성을 역사상 인물을 실례로 정리한 내용의 ‘권념요록’ 등이 남아있다.

환성당(喚醒堂) 지안(志安, 1664∼1729년)스님은 설암스님과 더불어 월담스님의 대표적인 제자였다. 지안스님은 15세에 경기도 미지산 용문사에서 출가, 상봉스님에게서 구족계를 받고 17세에 금강산의 월담 스님을 찾아 법맥을 이었다. 숙종 16년(1690)에 벽암스님의 제자인 직지사 모운스님의 화엄법회에서 법좌에 올랐던 지안스님은 이후 여러 곳에서 강석(講席)을 열어 후학을 교도하며 종풍을 크게 떨쳤다. 특히 스님의 강설은 뜻이 깊고 독특한 것들이 많아, 영조 1년(1725) 금산사의 화엄대법회에서는 학승 1400명이 강설을 들을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대둔산에서 공양을 베풀 때 허공에서 지안스님을 부르는 소리가 세 번 울리자 세 번 답변을 했다고 전한다. 그래서 자(字)를 삼락(三諾)이라 하고, 호를 환성(喚醒)이라 했다.

그러나 스님은 후에 지리산 토굴에서 수행 중에 무고를 당해 호남에서 5년간 감금됐다. 더욱이 무죄가 판명됐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영조 5년(1729)에 제주 유배길에 오르고 같은 해 7월 1일 제주에 도착해 7일째 되던 7월 7일 홀연히 입적하게 된다. 그때가 세수 66세, 법랍 51세. 전라남도 해남군 대흥사에 스님의 비가 있다.

저술로는 스님이 직접 여러 전적에서 선종의 다섯 종파에 대한 요의를 발췌하여 지은 ‘선문오종강요(禪門五宗綱要)’와 ‘환성시집((喚醒詩集)’ 등이 있다. 특히 ‘선문오종강요’는 임제종에 대해서는 기용(機用)을 밝힌 것이라 하고, 운문종에 대해서는 절단(截斷)을 밝힌 것이라 하며, 조동종에 대해서는 향상(向上)을 밝힌 것이라 하고, 위앙종에 대해서는 체용(體用)을 밝힌 것이라 하며, 법안종에 대해서는 유심(唯心)을 밝힌 것이라 하여 각 종파의 핵심을 간파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불사리탑사에 조성된 보우·지안스님의 순교비는 후손들에게 당시 불교사와 스님들의 노력을 널리 알리고, 불교유배인에 대한 조사·연구의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제주지역의 소중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불교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보우·지안스님에 대한 인식은 미흡한 실정이다. 이로 인해 보우스님에 대한 시각도 한쪽에서는 성인으로, 다른 한쪽에서는 요승으로 엇갈리고 있다. 이런 상황은 유배문화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추진되고 있는 제주지역도 예외가 아니다.

제주유배문화의 재조명을 위해서는 억불정책이 팽배했던 시대상황을 고려, 보우·지안스님 등 불교유배인에 대한 연구가 선결과제라 할 것이다. 특히 오늘의 불교사적 가치기준을 뚜렷이 설정하고 미래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서도 당시 불교와 스님들에 대한 왜곡된 기록들은 근본적으로 재검토돼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부재가 지금까지도 역사적 가치의 혼돈으로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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