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제주에 온 유배인과 불교④-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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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획-제주에 온 유배인과 불교④-ⅱ
  • 강석훈 기자
  • 승인 2005.05.30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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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억불책 맞서 불교중흥 맥이어

행호스님, 백련사 중창 후 세종에 발탁돼

반불교 유생들에 의해 제주유배후 입적



   
 
   
 
조선 초기의 행호스님, 중기 보우스님, 후기 지안스님. 이들의 공통점은 억불정책이 판을 치던 조선시대에 불교를 부흥시키려다 유학자들의 견제로, 제주에 유배된 후 입적한 스님들이다.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이들을 조선불교의 삼성(三聖)으로 평가하고 있다. 특히 조선초 천태종의 종주로 널리 알려진 행호(行乎)스님은 백련결사의 도량이었던 백련사를 중창하고, 선종의 본산이었던 흥천사 주지 소임을 맡으면서 당시 불교계를 주도했던 대표적 인물이다.

백련사의 중창은 세종 8년(1426)에 행호스님이 등장하면서 불사를 성공으로 이끌게 된다. 당시 행호스님은 임금의 장수와 국가의 복락을 기원, 효령대군에게 편지를 보내 대덕공주가 돼줄 것을 청했고, 효령대군은 절에 시주를 하는 등 스님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1430년부터 7년 간에 걸친 백련사의 중창불사가 대대적으로 이뤄지게 된다. 스님은 특히 당시 침입이 잦았던 왜구를 막기 위해 절 앞에 토성을 쌓았는데, 훗날 이 성은 ‘행호산성’이라 불리게 되며, 이로써 백련사는 옛 모습을 되찾게 된 것이다.

한편 행호스님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조선조 4대 임금인 세종이다. 세종은 초기에 부왕의 뜻을 이어 사찰을 폐쇄하는 등 불교 억제정책을 폈지만, 말년에는 불교에 귀의하면서 중흥정책을 폈던 임금으로, 그의 불교정책은 조선불교사에 있어서 큰 의미를 지닌다. 특히 행호스님은 효령대군이 ‘부처의 화신’이라 칭하며 세종에게 천거, 흥천사에 주석하면서 세종의 불교옹호 정책에 힘을 실었던 인물이다.

당시에는 해마다 정초에 사람을 사찰에 보내 임금을 위해 복을 비는 국가 의식이 있었는데, 세종은 즉위 초에 이 행사를 중지시켰다. 또 봄과 가을에 스님들을 시켜 거리를 돌며 경을 외고 바라춤을 추며 재앙을 물리치게 하는 행사 때, 2품 이상의 벼슬아치들이 향을 올리는 의식도 없애게 했다.

이로 인해 유학자들이 스님들을 살해하거나, 절에서 술판을 벌이는 등의 폐단이 초래되기도 했다. 특히 세종은 36개소의 사찰에만 토지의 수조권을 인정하라는 유학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선종의 도회소는 흥천사로, 교종의 도회소는 흥덕사로 지정해 각기 18개소의 사찰을 나눠 소속시켰다. 때문에 당시 불교는 선종·교종의 양종으로 통합됐고, 36개소의 사찰만 국가에서 공인된 것이다. 세종은 이러한 사찰 정비 이후 불교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던 ‘승록사’를 폐지하고, 스님들의 도성 출입도 엄격하게 통제하게 된다. 그러던 세종은 말년에 병에 시달리면서 불교에 대한 인식과 그에 따른 불교정책도 바뀌게 된다.

1438년에 세종은 유생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흥천사를 대대적으로 수리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그는 불사를 하는 동안 흥천사에 있던 불구를 경복궁내 상의원으로 옮기고, 당시 백련사를 중창하며 명망이 높았던 행호스님을 도성으로 데려왔다. 이때부터 조선 초기 쇠퇴의 길로 치닫던 불교가 부흥기를 맞은 것이다. 선종판사로 임명된 행호스님은 흥천사에서 자주 법석을 열었는데, 당시 도성 안에서 다시 염불 소리가 나고 범종과 범패 소리가 들렸으며 스님들도 도성을 자유롭게 왕래하게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발도 거셌다. 성균관 유생들은 사리를 더러운 물건으로 치부해 궁중에 놓아둘 수 없다느니, 이단이 다시 일어나 행호스님을 스승으로 받들고 있다느니, 선왕이 내린 금법을 어긴다느니 등 온갖 반대 이론을 폈다. 특히 이들은 동맹휴학을 감행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했고, 사헌부와 사간원의 벼슬아치들은 흥천사에서 안거하고 있던 스님들을 잡아들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세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임금의 허락이 없이는 포졸이 절에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엄명을 내렸다.

또 세종은 “사리가 더러운 물건이라면 흥천사 사리각에 두는 것도 옳지 않을 것이다. 흥천사와 흥덕사는 선왕이 세운 절이며 스님들도 나의 백성이니 굶길 수 없다”며 “지금 스님들을 침해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세워 두어야 하겠다”고도 말했다.

세종의 이런 불교옹호는 스님들의 도성 출입이 자유로워지고 농민 가운데도 출가하는 자가 늘고 15세 이상의 출가규정을 어기고 어린이들까지 사미승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세종은 40세 이하의 스님들을 환속시켜 군액을 늘리라는 최만리의 요구로 인해, 두 절에 별로 중요치 않는 일로 출입하는 사람들을 통제할 것과 행호스님을 돌려보내는 조치를 내렸다. 조선 초기에 불교부흥을 주도했던 행호스님은 이때 유생들에 의해 제주에 유배돼 입적을 하게 된다.

세종은 나이가 들수록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두터워져 ‘월인천강지곡’을 지어 부처님을 찬탄했고, 죽음을 앞두고는 태종이 철거했던 왕실 사찰 ‘내불당’을 경복궁 안에 다시 짓게해 내불당에서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에게 불경을 강의하게 했다. 때문에 행호스님은 세종의 불교옹호 정책에 있어서 중심 인물이었던 동시에, 당시 유학자들의 끊임없는 견제에 세종이 타협하면서 희생된 비운의 인물이지만, 결국 조선초기에 사그라져 가던 불교의 명맥이 이어지게 된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다.



유장스님, 화엄사 강설때 1500여 대중 운집

관찰사 조모의 무고로 제주유배, 훗날 방면돼



한편 조선시대 제주 유배와 관련해서는 ‘혜암의 난’이라 일컬어지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 주인공은 조선시대 영·정조 때의 유장(琉藏)스님이다.

유장스님은 본래 전남 해남군 대흥사에 머물다가 후에 구례군의 화엄사에 주석했다. 유장스님은 당시 강설로 명성을 얻었는데, 대중 1500여 명이 스님의 강설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스님은 전라도 관찰사 조모에 의해 아무 죄 없이 제주로 유배된다. 이 소식을 접한 승도들은 스님의 신원을 위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렸고, 결국 무죄가 밝혀지면서 유장스님은 방면된다. 특히 스님을 무고했던 관찰사 조모는 그 처지가 뒤바뀌어 무고죄로 인해 오히려 제주에 유배된다.

유장스님이 사면돼 돌아가던 시기가 정조 8년(1784)인데, 이때 아이러니한 역사의 단편을 볼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제주를 떠나게 된 스님의 배와 유배를 위해 제주로 들어오던 관찰사 조모의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충돌한 것이다. 당시 상황이 정확하게 묘사된 기록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호남지방의 승도들은 이 두배의 충돌을 ‘혜암(惠菴)의 난’이라고 일컬었다. 제주를 떠난 유장스님은 그 후 친상(親喪)을 만나 강설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충효에 정성을 다했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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