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을 위한, 불자를 위한, 봉사자를 위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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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민을 위한, 불자를 위한, 봉사자를 위한 삶
  • 이병철 기자
  • 승인 2017.02.24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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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불교 초대석 오홍식 대한적십자사 제주특별자치도지사 회장·탐라성보문화원장<1>

새롭게 2017년 정유년의 희망찬 해가 떠올랐다. 정유년 새해에도 본지는 진리의 빛을 전하겠다는 전법의 원력을 다하고자 정진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달음질쳐 나아가려 한다.   
이에 새해 일곱번째 오홍식 대한적십자사 제주특별도지사회장·탐라성보문화원장을 모시고 제주의 미래를 열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오홍식 회장은 40여년을 공직생활을 하며 도민을 부처님으로 모신데 이어 적십자정신에 맞는 봉사의 삶을 기약하고 있다.

 공직계의 수장이 어떤 종교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늘 종교편향적인 요소가 불거져 왔다. 이처럼 불교계에 불합리한 일이 있을 때마다 불교계의 목소리를 내며 부처님과 불자들을 외호하는 역할을 40여 년 동안 수행 해 온 이가 바로 오홍식 대한적십자사 제주특별자치도지사 회장이자 탐라성보문화원장이다. 특히 오 회장은 공직생활 동안 도청반야불자회를 시작으로 제주·서귀포시에도 불자회 창립을 통해 불자 공직자들이 부처님의 지혜로 도민들에게 봉사를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선구자였다.  

 이처럼 공직자불자 신행단체의 탄생은 도정의 정책 집행 시 조금이라도 종교편향적인 요소가 사전에 발견되면 바로잡는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실정법을 잘 모르는 사찰과 신행단체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친절히 돕는 데에도 힘을 모았다.
공직자의 위압적인 자세보다 도민들에게 행정 서비스를 부처님의 자비와 보시의 가르침으로 전하던 오 회장은 지난 2014년 8월 명예퇴직을 하며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공직자로 기억되고 있다.

 퇴직 후에는 본격적인 불교문화창달의 디딤돌인‘탐라성보문화원’을 2016년 12월 창립하면서 불교계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문제의 근본을 해결하고자 팔을 걷어붙였다. 근본 원인은 제주불교계가 불교문화재에 대한 낮은 관심과 정부 지원 또한 열악한 편인데다 그나마 종교편향이라는 논리에 휘말렸던 엄연한 현실에서 출발했다. 불교문화재가 국가의 유산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불교문화재로 편향되는 것은 종교적 갈등에서 비롯됐고, 불교계의 논리적인 대응력이 부족했던 것을 풀어나가는 열쇠가 바로 탐라성보문화원의 첫 걸음이었다. 

 특히 지난 2월 오 회장에겐 더욱 무거운 짐이 맡겨졌다. 지난해 8월부터 대한적십자사 제주지사 회장 선출을 놓고 파행을 빚으면서, 지난 2015년부터 적십자사 상임위원으로 활동했던 오 회장이 그 중책을 부여받았다. 대한적십자사 제주도지사는 지난 1월 12일 나눔홀에서 열린‘2017년도 제1차 제주적십자사 상임위원회’에서 오 상임위원을 만장일치로 회장에 추대했다. 1월 16일 인준을 받고 본격적인 대한적십자 목적에 맞게 숭고한 인도주의 정신으로 나눔문화 정착과 복지증진에 힘쓰고 있는 오홍식 제33대 대한적십자사 제주특별자치도지사 회장을 지난 16일 대한적십자 회장실에서 만나, 그동안의 삶의 이야기를 나눴다.

공직생활 40여년의 열정
 오 회장은 지난 1975년 공직에 입문, 지방직 공무원의 최고직인 제주도기획관리실장(2급, 이사관)을 끝으로 명예퇴직을 했다. 40여 년 동안 공직 생활의 소회는 어떨까.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고등학교를 겨우 마칠 수 있었죠. 1975년 대학을 가고 싶은 마음에 입학금을 벌려고 임시직으로 공무원 일을 했어요. 다음해 군대 영장이 나와 군대 갔다 온 후 우연히 공무원 시험을 봤는데 덜컥 합격한 겁니다.”

 1977년부터 공직생활의 시작은 제주시청 새마을 운동 부서였다. 그 후 지난 1984년부터 1995년까지 11년 동안 의전을 총괄하는 총무부서에서 일하면서 오 회장에겐‘의전의 최고수’‘완벽주의자’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전두환 대통령을 비롯해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이 1년에 1~2차례 국가적인 행사의 의전을 포함해 도지사의 4개 시·군 연두순시 등 의전업무에 탁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인지 많은 윗사람들이“오 사무관이 없으면 행사를 못 한다”고 의전만큼은 칭찬이 자자했다. 그 소문은 중앙 무대까지 퍼졌다. 청와대에서도‘의전의 베테랑’이라고 닉네임까지 얻었다. 
 “자연스럽게 각 사회단체 등에서도 의전을 물어 볼 정도였습니다. 여기에 제주시장님, 제주도지사님 수행비서를 4년 6개월 동안 했으니까 윗사람을 모시는 공직생활을 17년 6개월 정도 했네요. (웃음)”
 의전의 대명사가 되다보니 일반업무를 접할 기회가 적었던 오 회장은 가슴 한 켠에 아쉬움으로 남았을 무렵, 지난 2004년 감사계장으로 좌천(?)된다. 

불평을 더 큰 성공의 밑거름으로
 “감사부서는 당시 기피부서였거든요. 하지만 좌천이란 생각보다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가짐으로 일을 추진했습니다. 2006년 특별자치도가 출범하면서 감사부서의 독립이 쟁점으로 떠올랐고, 일본과 독일의 사례를 반영해 감사위원회가 출범하게 됩니다. 제주도 감사관실 감사담당, 도 감사위원회 조사팀장·조사과장·감사과장, 감사위 사무국장까지 7년 동안 감사위원에서 업무를 맡게 됐습니다. 공직생활 가운데 감사위원회를 탄생시킨 것이 가장 큰 성과라고 봅니다.”
 이처럼 오 회장은 실패나 좌절을 오히려 더 큰 성공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감사부서로의 발령을 불평하지 않고 다양한 일반업무를 볼 수 있는 기회로 여기면서 한 단계 더 내공을 쌓는 계기가 됐다. 그러면서 오 회장은 제주부시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공직생활의 꽃을 활짝 피게 된다. 2년 6개월의 최장수 부시장이었던 오 회장은 가장 보람 있었던 시간이라고 기억했다.

시민에게 봉사했던 2년 6개월
 “그 당시 구도심 침체로 인해 활성화 방안이 한창 논의되던 시기였죠. 한국토지주택공사에서 원도심 재개발 계획안을 수립했지만 포기를 했습니다. 그 이유는 기존 지역 상인과 지역민들이 자기부담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원도심의 모습을 살리며 문화거리로 조성을 해야겠다는 정책으로 구, 제주대학교병원 주변을 문화벨트로 가꾸면서 문화예술의 살아 숨쉬는 구도심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었다. 도내로 많은 인구유입으로 인해 기존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면서 원도심에도 우후죽순으로 고층 아파트의 난입으로 옛 도심의 단아한 모습이 헝클어졌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오 회장은 ‘국수집 거리’ ‘횟집 거리’ ‘흑돼지 거리’등 거리 특화를 활성화했고, 한라생태숲, 사려니숲길, 절물휴양림, 돌문화공원 숲길을 잇는 생태숲길 벨트를 조성하여 도민과 관광객들이 시외버스를 이용해 즐길수 있는‘힐링의 섬’모티브를 설계했다.
 반면 제주도기획관리실장 당시 행정시장 직선제가 도마로 떠올랐는데도 결론을 내지 못한 게 가장 아쉬운 점이라고 밝혔다.
 오 회장은 “2013년 도민 여론조사를 통해 85.9%의 압도적인 찬성 여론이 형성됐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결국 도의회에서 부결됐다”며 “행정시장을 도지사가 임명한다면 결국 도지사의 눈치로 인해 소신있는 행정을 펼칠 수 없는데 시민의,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정치’가 펼쳐져야 한다”고 행정시장 직선제에 필요성을 역설했다.


<다음호에는 오 회장의 ‘불교 인연’과 ‘대한적십자사 제주지사 회장의 포부’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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