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스스로를 돌아보고 마음을 허공처럼 맑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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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스스로를 돌아보고 마음을 허공처럼 맑게 하라”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02.23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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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호 기사

해가 바뀌고 정유년 새해가 밝았다. 묵은해의 어둡고 힘들었던 일들이랑 툴툴 털어버리고 새해에는 수행 정진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호 사자후는 일타 스님의 법문을 실었다. 일타 스님은 우리의 마음을 항상 스스로 돌아보고 마음을 허공처럼 맑게 해야 영원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하셨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나의 주인공을 찾고자 하는 마음과 항상 번뇌망상을 버리는 두 마음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편집자 주>

 

 지금부터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참된 ‘나’를 위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의 앞길에는 행복과 사랑과 자유가 가득한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그렇다면 참된‘나’를 찾고 올바로‘나’를 사랑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수없이 많다. 중생의 그릇에 따라, 병에 따라 약을 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많은 가르침 속에서도 하나의 핵심은 한결같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 핵심은, ‘항상 스스로를 돌아보고 마음을 허공처럼 맑게 하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명제가 숨어 있다. 하나는 그 어떤 것보다 나의 주인공을 끊임없이 돌아보고 끊임없이 찾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비우라’는 것이다. 
먼저 첫 번째 명제부터 살펴보자. 

 중국 송나라 초기, 단구(丹丘)의 서암에 살았던 서암 사언 스님은 날마다 판도방 앞마루에 걸터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서 자문자답하였다. 

 “주인공아!”
 “예.”
 “정신차려라〔星星着〕.”
 “예.”
 “뒷날에도 남에게 속지 말라.”
 “예.”

 서암 스님이 매일같이 부르고 답한 주인공. 이 주인공은 우리가 본래부터 지니고 있었던 근본자리이며, 부모 태중(胎中)에 들어가기 전의 참된 모습이다. 
우리는 이 주인공과 함께 살아왔고 지금도 이 주인공과 함께 살고 있다. 이 주인공은 우리를 잠시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주인공을 잊으며 살아가고 있다.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아니 조그마한 간격도 없기 때문에 잊고 사는지도 모른다. 바로 이 주인공을 잊지 말고 점검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참선기도·간경·주력 등의 방법이 있고 그중에서도 참선을 으뜸가는 수행법으로 보고 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주인공을 돌아보는 것도, 참선 수행도 잘 안 될지 모른다. 그러나 부처님의 법과 인연이 주어진 이때 힘써 닦으면, 지금은 닦기 어려운 행일지라도 닦아 익힌 힘이 쌓여 차츰 어렵지 않게 된다. 부처님을 비롯하여 이전에도 도를 이룬 분들 중 범부(凡夫)아니었던 이가 어디 있었던가?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주인공을 돌아보며 꾸준히 정진해 보라. 좋은 날은 반드시 돌아오게 마련이다. 아니, 수행하는 그날그날이 모두 좋은 날로 바뀔 수 있다. 모든 것은 나에게 달려 있다. 용기를 잃지 말고 정진해야만 한다. 

나의 주인공을 끊임없이 돌아보고 
끊임없이 찾으며 살아야 한다

 두 번째 명제인 ‘비우라’는 것은 마음속의 잡된 생각을 비우라는 것이다. 많고 많은 사람들, 과거의 부처님과 수많은 조사(祖師)들은 불문(佛門) 속에서 도를 이루었다.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불문, 그 첫 번째 관문을 우리는 일주문이라고 한다. 기둥을 일렬로 세워서 만든 대문이라 하여 일주문이라 한 것이다. 이 일주문에는 문짝이 달려 있지 않다. 그냥 뻥 뚫려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일주문을 달리 공문(空門)이라고도 한다. 
 공문은 뻥 뚫려 있기에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을 할 수 있다. 가난한 사람, 부유한 사람, 죄 많은 사람, 깨끗한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다. 들어오고자 하는 사람은 들어올 수 있고, 나가고자 하는 사람은 마음대로 나갈 수 있다. 이렇게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문이 공문인 것이다. 
 그러나 이 문을 통과하여 부처님의 경지로 나아가고자 하는 이에게는 단 한 가지 제약이 주어진다. 잡된 생각을 텅 비우고 참된 주인공을 찾겠다는 한 마음을 잘 다져서 이 문을 들어서라는 것이다. 비록 문짝을 달지 않아 뻥 뚫려 있는 공문이지만, 그 잡된 생각들이 공문을 메워 유문(有門)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잡된 생각이란 무엇인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삼독심(三毒心), 재욕·색욕·식욕·명예욕·수면욕 등 오욕락(五欲樂)이 그것이다. 이들에 의해 사랑에 걸리고 재물에 걸리고 감정에 휘말리게 되면, 어느 새 공문의 기둥과 기둥 사이에서 문짝이 생겨나와 유문으로 바뀌어 버린다. 그리고 출입을 막기 위해 스스로 빗장을 굳게 걸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놓아 버리고 비워 버릴 줄 알아야 한다. 탐착하고 있으면, 꼭 담고 있으면 결코 공문을 통과할 수가 없다. 이제 이를 일깨우는 부처님 당시의 이야기 한 편을 음미하면서 끝맺음을 하여 보자. 

 어느 날 흑씨(黑氏) 바라문은 신통을 부려서 만든 합환오동(合歡梧桐)꽃 두 송이를 양손에 들고 와서 부처님께 바치고자 하였다. 그때 부처님은 조용한 음성으로 흑씨 바라문을 불렀다. 

 “선인(仙人)아!”
 “예, 부처님.”
 “버려라.”

 흑씨 바라문이 왼손에 든 꽃송이를 버리자 부처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선인아, 버려라.”
 이번에는 오른손에 든 꽃송이도 버렸다. 그러나 부처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선인아, 버려라.”
“부처님, 저의 두 손은 이미 비었습니다. 다시 무엇을 버리라 하시나이까?”
“나는 너에게 그 꽃을 버리라고 한 것이 아니다. 너의 마음에 가득 차 있는 번뇌망상을 일시에 버려서 더 이상 버릴 것이 없게 될 때 생사를 면하게 되느니라.”
 부처님의 이 말씀 끝에 흑씨 바라문은 대오(大悟)를 하였다. 
 부처님께서 흑씨 바라문에게 말씀하신 ‘버려라’ 이 한 마디야말로 공문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이다. 어찌 참된 해탈과 진리를 밖에서만 구할 것인가?

 놓아 버리자. 
 비워 버리자.
 놓아 버리고 비워 버릴 때 모든 고통과 장애가 사라지고 해탈의 세계, 부처님의 정토(淨土)가 우리들 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이제 전체의 내용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자 한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인가? 돈·명예·쾌락·육체? 아니다. 그것 이전에 참된 나의 주인인 마음자리를 위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나’ 속에 있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회복해 가져야 한다. 우리 모두의 소원처럼, 더 이상은 괴롭고 어리석게 살지 말고, 행복하고 지혜롭게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사는데 필요한 묘법(妙法)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항상 주인공을 점검하고 내 속의 구정물을 비우면서 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이를 부디 명심하여, 우리 모두 영원과 행복과 자유와 청정이 깃든 세계를 향해 노를 저어가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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