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 부처님의 청정광명과 무량복이 흘러 들어오게 하는 기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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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 부처님의 청정광명과 무량복이 흘러 들어오게 하는 기술 …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02.23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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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덕 스님 사자후

정유년을 행복한 한 해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한다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이‘공양’이다. 이번 주 사자후는 광덕 스님의『보현행원품 강의』가운데 「공양분」을 실었다. 스님은‘공양’이야말로 부처님의 청정광명과 무량복이 흘러 들어오게 하는 기술이라고 말한다. 이 기술을 우리 모두가 함께 배우고 실천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편집자 주>

 

 부처님 세계는 일체 공덕의 근원이며 만복이 거기에 구족함은 이미 여러 차례 말했다. 이 부처님의 공덕세계는 영원히 변함없으며 그것이 어떤 한정된 국토에 갇힌 것이 아니라 일체 세계에 두루하고 있다. 부처님의 공덕세계는 한계가 없이 일체에 두루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수행한 사람이나 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만 열린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 모든 중생 앞에 평등하게 열려 있다. 
 아무도 이 부처님의 무한공덕장 세계 밖에 있는 사람이 없고 차별된 중생이 없다. 일체 중생이 그 속에 살며 그 공덕을 생명으로 하여 살고 있다. 이것이 실상이다.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이다. 그런데 중생들 세계는 혹은 복되고, 혹은 영화롭고, 혹은 불행하고, 혹은 고난을 헤매고 있는 것이 우리 눈에 띄는 바이니 이것은 웬일일까? 그것은 스스로 마음을 일으켜 자기를 한정하고 자기를 비소화(卑小化)시키며, 이 한정되고 비소화시킨 작은 것을 자기로 그릇 알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생의 차별이 생기는 근원이다. 
 이 세상이 이와 같이 태양 아래 광명천지이건만 스스로 눈을 가려 밝음을 보지 못하는 자도 있고, 어두운 굴속에 빠져 그곳이 자기 세계인 줄 그릇 알고 밝은 세계, 찬란한 빛깔의 세계를 모르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중생들의 광명천지의 무한공덕 세계를 되찾아서 복스럽게 수용하고 살려면, 첫째는 그릇된 자아에서 벗어나 참 자기에 눈을 열어야 할 것이고, 또 하나는 그릇된 집착을 놓는 훈습이 있어야 한다. 이 그릇된 집착을 버리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부처님의 청정광명과 무량복이 흘러 들어오게 하는 기술이 공양이라는 수행법이다. 

 공양은 그릇된 자기의 집착을 버리고 부처님의 청정 공덕을 끌어들이는 기술이라 했는데 이것은 무슨 말일까? 자성을 잃고 그릇된 개아에 집착하는 중생들은 자기 눈으로 보는 육신을 자기로 삼고 자기 마음속에 움직이는 경계를 자기 내용으로 삼는다. 그래서 자신에게 보탬이 되고 이로움이 되거나 손해가 되고 위험으로 생각하는 것을 자기 한 몸을 중심으로 생각을 일으킨다. 그래서 그러한 몸을 보존하고 그러한 생각에서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는 생각들을 함께 움직여서 이로운 것은 사랑하고 애착하며, 거슬리는 것은 미워하고 대립하고 원망하며 배척하고 마침내는 적대시한다. 이렇게 중생들은 누에고치에 갇힌 누에처럼 부처님의 복된 광명천지와는 등지게 된다. 그릇된 집착, 행동으로 공덕세계와는 담을 쌓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고난은 가중되고 인간 중심은 비소화하며 그의 행위는 거칠고 불안하고 추악하게 된다. 이 상태에 이른 중생들은 작고 굶주린 자기를 의식하면서 자기 일신의 안전과 충족을 위해서 무턱대고 소유욕이 발동하며 그 확대를 향해 노력을 기울인다. 어떻게든 좋은 것을 많이 먹고 자기 앞으로 끌어당겨 두자는 욕망이 일어나는 것이다. 더욱이 자기 일신을 지탱하고 윤택하게 할 조건과 재화가 한정되고 넉넉하지 못하다는 견해, 예를 들면 자원고갈의 견해가 풍미하는 사태에서는 이들의 자기 보존을 위한 밖으로부터의 획득 충동이 더욱 가중된다. 또한 이럴수록 인간미망(迷妄)은 더욱 가중된다. 

 그런데 공양은 자기중심의 집착을 버리고 주는 것이다. 자기 보존의 집착과 축적이 아닌 방하(放下)이다. 더욱이 공양은 부처님을 생각하며 가장 존귀한 것을 최상의 정성을 기울여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은 한정된 한 부처님이 아니라 처처에 부딪치고 대할 수 있는 가족이나 벗이나 중생이라는 부처님이다. 여기서 공양이 갖는 절대적 우월성을 알게 된다. 

 공양은 인간을 무한공덕세계로 해방시킨다. 어둡고 자그마한 중생의 마음속에 무한청풍 만복공덕이 흘러들게 한다. 공양한다는 것은 내가 가진 물건을 아낌없이, 오히려 정성과 기쁨으로 부처님이나 그밖의 사람에게 내어 주는 것이니 이것은 자기 집착을 놓고 마음의 문을 여는 행위가 된다. 
 공양은 무한한 공덕세계에서 자기를 국집하고 자기를 내세워 스스로 자기를 한정함으로써 무한한 복덕세계를 등지게된 범부들이 자그마한 국집을 떠나 큰 공덕세계로 뛰어나오는 행위다. 그러므로 공양은 완전히 무심이어야 하며 무조건이어야 하며 무주상이어야 최상의 공양이 된다. 무심·무조건·무주상의 공양에서 비로소 무한 공덕세계와 합치된다. 반대로 대가를 바라는 공양이나, 공양하였다는 생색을 내는 공양이나, 공양한 생각에 머물러 있는 공양은 모두가 작은 공양이며 따라서 그 공덕도 그만큼 작을 수밖에 없다. 
 공양은 주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한을 받는 것이다. 본래입장에서는 주고받음이 없이, 상이 없이 움직이는 청정공덕세계의 왕성한 무심순환이지만 이것을 중생편에서 보면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것이다. 
 공양의 본질이 무한공덕장의 활동상이며 그것은 공덕의 무심순환임을 안다면 왕성히 주고받는 대공양을 교환하는데서 번영이 있는 것이라 하겠다. 무심으로 주고 무심에서 받는 세계가 유기체의 자기 관리 상태이며 복지사회가 도달할 최후의 경계가 아닐까. 이 도리를 안다면 우리는 끊임없는 공양의 연속으로 우리와 우리 국토의 평화 번영을 이룩할 지혜를 열어가야 할 것이다. 

 경에서는 “낱낱 부처님 계신 곳마다 한량없는 보살님들이 둘러 계심에 내가 보현행원의 원력으로 깊고 깊은 믿음과 분명한 지견을 일으켜 여러 가지 으뜸가는 묘한 공양구로 공양….”이라 하였다. 일체 세계 어느 곳이고 항상 계시는 부처님을 분명히 믿고 그 모든 부처님께 깊고 깊은 믿음과 정성을 기울여 최상의 공양구로 공양하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불국토에 계신다. 부처님 계신 곳이 불국토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 공양하려면 부처님을 찾아가야 한다. 부처님은 어디에 계실까? 중생이 형상에 걸린 눈으로 볼 땐 처처에서 중생과 죄악을 보지만 상을 여읜 반야의 눈으로 볼 때는 일체 세계에 불보살이 충만하다. 고마운 이웃이 불보살이며, 스승님이 불보살이며, 부모님이 불보살이며, 형제와 가족이 불보살이다. 온 세상 온 나라 사람들 모두가 불보살인 것이다. 저들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며 저들이 우리를 보호하고 기쁨을 준다. 깊고 깊은 믿음과 분명한 지견으로 불보살은 이 국토 처처에 흩어져 있음을 보고 존경과 공양을 쉬지 않는 것, 이것이 보현행원의 공양이다. 
 따라서 이 공양은 내가 얼마만큼 공양했다느니, 공양한 공덕이 있다느니 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오직 받들고 이바지하는 순수한 마음뿐이어야 한다.『금강경』에는 무주상보시의 복덕을 말씀하고 있다. 보시하되 보시한 상에 머물러 있지 않으며 그 공덕은 온 우주 허공을 헤아릴 수 없듯이 공덕 또한 무량하다 하였다. 그러므로 공양에는 공양하는 물건의 많고 적은 것이 전혀 문제가 안 된다. 믿음과 정성 그리고 무주상만이 참된 공양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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