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 도법 스님은 왜 화쟁의 중심에 서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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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 도법 스님은 왜 화쟁의 중심에 서 있나
  • 이병철 기자
  • 승인 2017.03.10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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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불교 초대석 도법 스님 조계종 화쟁위원회 위원장
제주출신인 도법 스님은 17세에 김제 금산사에서 출가, 1998년 조계종 분규시 총무원장 대행을 맡아 사태를 해결 후 본격적으로 화쟁 사상을 통한 부처님의 지혜로 이 세상의 분쟁을 중재하는데 노력해 왔다.

새롭게 2017년 정유년의 희망찬 해가 떠올랐다. 정유년 새해에도 본지는 진리의 빛을 전하겠다는 전법의 원력을 다하고자 정진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달음질쳐 나아가려 한다.   
이에 여덟 번째 조계종 화쟁위원장 도법 스님을 만나 제주의 미래를 열어보고자 한다. 

도법 스님은 한국 실천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는 1000년 전 원효 대사의 화쟁 사상을 이용한 불교적 지혜로 풀어야 한다는 스님의 지론에서 시작됐다.

이 같은 지론은 어릴 적 성장에서부터 자신도 모르게 형성된 자아에서 비롯됐을까. 스님의 고향은 한림읍 명월리다. 도민들의 최대 아픔인 4·3의 광풍이 휘몰아쳤던 지난 1949년 태어났다. 스님의 가족들은 왜 고향을 등지고 전북 김제로 떠나야 했을까. 지난달 22일 조계종 총무원 화쟁위원장실에서 스님을 만나 그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내 고향은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 
한림읍 명월리 명월초등학교를 다닌 스님은 명월리 마을을 중심으로 형성된 맹나무군락과 다양한 식생의 자생림이 조화를 이룬 월대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 월대에 가면 당이 있었는데 그 곳에는 한여름에도 우거져서 으스스 했어요. 학교를 걸어 다녔을 때 찔레꽃, 삥이, 삼동열매, 보리탈 등을 따 먹었던 기억에 지금도 입안에 침이 고입니다.”

시골의 유년시절이 그러하듯 스님은 “집마다 약재로 쓰였던 지네를 잡으러 갔던 추억, 닭에 된장을 먹이면 힘이 세진다고 하여 된장 먹인 닭으로 닭싸움을 붙였던 일, 형을 따라서 개를 몰고 꿩 사냥에 나섰던 기억 등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기억했다.  

스님은 유년시절 잊지 못할 기억 하나를 꺼냈다.“하루는 어머니가 마실 나가신다며 집을 신신당부했어요. 하지만 친구들과 노는게 제일이었던 시절이라 놀이터에 나가 팽이치기, 자치기 등을 하고 집에 왔더니 집의 장닭이 없어진 거죠. 그야말로 어머니에게‘나는 모른다’고 말했다가 빗자루로 개 패듯이 맞아 집에서 쫓겨났어요. 밤이 깊어서야 집으로 왔는데도 억울한 마음이 풀리지 않더군요. 서럽게 울다 잠이 들었는데 다음날 새벽에 장닭 울음소리가 들리는 겁니다.(웃음)”

스님은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유복자였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열 살 위인 형님에게서 출가 후에 들었다.“아버지는 농부였지만 농부같지 않게 옷도 단정하게 하고 다니셨다고 전해 들었어요. 아버지는 4·3당시 돌아가신것 같아요. 경찰들이 어머니를 부역했다는 등‘빨갱이 집안’으로 낙인찍히면서 가장을 잃은 집안의 가세는 기울어졌고,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960년 초 김제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스님 모친의 고향은 한림읍 금악이다. 어머니는 친정 제삿날이면 깜깜한 밤에 스님을 데리고 갔다. 그 무렵, 특이한 것은 금악 인근의 절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는데 지금의 수운교 같은 느낌이라고 기억했다. 김제로 이사 온 배경도 어머니 친척 가운데 미륵 신앙하는 분이 김제 금산사에 인연을 맺고 있어서 김제로 이사를 왔다고 전해 들었다. 

 

‘행동하는 지식인, 참 지성인’의 표본으로
어머니가 중학교를 보내주시지 않았다. 김제 금산사 인근에‘청룡암’이라는 암자가 있는데 어머니 나름대로 미륵 신앙을 갖고 계셨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진산교 혹은 미륵교’같은데 이상향을 꿈꾸는 미륵부처님이 오시기 때문에 현대식 공부는 필요 없다는게 어머니의 지론이었죠. 1965년 열 일곱살이 되어 월주 스님을 은사로 출하기전, 절을 오가며 농사를 지었어요. 어린 시절 주체적으로 무엇을 해보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저 웃어른이 시키는 대로 해왔죠. 그러다가 어머니가 권해서 출가를 고민케 됐고, 소설 <원효대사> <사명대사>를 보고 스님의 삶을 동경해 출가했습니다.”

그 후 2년 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출가했으니 어머니가 위독하더라도 안 만나는 것이 옳다 싶었다. 그런데 한 도반이 저를 부르면서 “아무리 스님이라도 어머니 아들인데 어찌 그럴 수 있느냐”는 질책을 하는 순간, ‘생사’에 관한 깊은 의문에 빠져들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원초적 물음을 품고 해인사 강원을 찾아 공부했지만 시원한 해답을 구하지 못했다. 결국 12년 동안 제방 선원에 방부를 들이며 수행을 했다. 화두 참구만으로 몸부림쳤고, 한동안<화엄경>에 빠져들었다. 김제 금산사에서 화엄학림을 열었다. 화엄학림의 정신은 이후 1990년 청정개혁승가의 결사체인‘선우도량’을 시작으로 실상사, 인드라망생명공동체 등으로 이어져왔다.

그 무렵, 수행이 삶과 통일되지 못하고 전통과 권위, 큰스님의 말씀에 경도돼 한국불교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었다. 1994년과 1998년 조계종 분규다. 1994년은 서의현 총무원장 스님의 3만기 연임을 반대하는 대중들의 불신과 불만이 폭발했고 개혁 요구가 분출됐던 시절이다. 그리고 4년 후 당시 총무원장 송월주 스님이 임기가 끝난 시점에서 또다시 발생한 종단 분규시에는 총무원장 대행을 맡아 인내와 포용력으로 사태를 해결한 뒤 조용히 산사로 돌아가면서‘행동하는 지식인, 참 지성인’으로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화쟁 사상을 통한 불교적 지혜로 접근
스님에게 수행자로서 둔 화두는 첫째, 인간·수행자로서 바람직한 삶이란? 둘째, 종단의 발전 방향은 무엇인가? 셋째, 사회의 모순의 순환, 이를 해결할 방법은? 결국 이에 대한 해답의 결론은 실천뿐이었다.

그래서 지난 2004년 실상사 주지 소임을 내려놓고‘생명평화 탁발순례’를 지리산 노고단에서 시작해 제주도 등 5년 동안 전국 3만리, 8만명을 만난 대장정을 회향했다. 

“그 안에서 얻은 것은 우리 사회가, 마을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마을공동체가 무너지는데 이는 사람들이 더 많은 돈, 큰 집, 좋은 자동차를 원하고 편하고 여유롭게 살기만을 원하다보니 그 안에 희생되고 있는 우리들의 정신적 가치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생명평화의 문제는 화쟁적 입장에서 접근이 필요하다고 느낄 무렵, 조계종단에서 화쟁위원회 출범한다고 연락이 왔다.

“평소의 고민을 제도권인 종단에서 하겠다고 제의가 오면서 조건없이 수락했어요.‘정치 쇼’라는 논란도 많았지만 말이 씨가 되는 역할을 하겠다고 불자들에게 다짐하면서 2010년 사회 및 종단 현안에 불교적 해법 제시와 중재를 담당할 조계종 화쟁위원회가 출범하게 됩니다.”

원효 스님의 ‘화쟁(和諍)사상’을 통해 풀어나가고자 출범한 화쟁위원회는 사회적 주요 현안이나 종단의 문제에 대해 중재자 역할을 해왔다. 쌍용차 해고노동자,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한진중공업 사태(2011년), 철도파업(2013년), 그리고 2015년 전국을 강타한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의 거취 논의 등 굵직한 사회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불교 내부적으로는 2014년 출범한 대중공사는 새로운 소통 문화로 눈길을 끌면서 종단의 현안문제 두고 열띤 토론문화를 정착시키는데 큰 밑그림을 그렸다는 데는 동의했지만 회의 결과가 곧 조계종의 의견으로 모아져 실현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도법 스님은 “자신있게, 당당하게 누가 말하더라도 한 치의 부끄럼없이 그 실현 가능성에 대해 만들어 놓았다”며 “그 씨앗을 틔우는 것은 종단이고, 사부대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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