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감정에서 벗어난 내 본질의 아름다운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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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감정에서 벗어난 내 본질의 아름다운 언어
  • 이병철 기자
  • 승인 2017.03.17 13: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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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국 스님 지상법문

좋은 인연 좋은 도량 선림사(주지 진학 스님)는 지난 11일 ‘선림사 지송일과 경전불사 회향법회’를 봉행했다.
이날 회향법회에 법사로 나선 석종사 금붕선원장 혜국 스님은 야운 비구 자경문의‘주인공아! 내 말 들어라’를 갖고 법문을 설했다. 이 내용을 요약 정리한다. <편집자 주>

 

내 몸은 내 스스로가 아닌 우주의 에너지가 만든 것
그렇기에 내 자신을 자학한다면 대단히 오만한 사람

부처님이 태어나면서 ‘천상천아 유아독족(天上天下唯我獨尊)-이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구나. 나의 생명이 소중하면 남의 생명도 소중하구나’라는 말씀은 ‘내 생명과 남의 생명이 둘이 아닌 주인공이다. 즉, 전체가 주인공’이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오른손 들었습니다. 그리고 왼손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 때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오른손을 들거나 왼손을 들거나 똑 같은 에너지입니다. 그럼 이 에너지는 개인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밤새 나무가 만들어 준 산소를 우리가 코를 통해 들이마십니다. 즉, 우리는 에너지를 빌려 쓰고 있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떠오르는 태양열 에너지는 우리 몸을 따뜻하게 만듭니다. 대지에서 나오는 모든 흙의 에너지는 내 생명을 지탱해 줍니다. 내 에너지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의 에너지가 떠받들어서 나를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만든 에너지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히 내가 스스로 내 목숨을 죽인다든지, 내 자신을 자학한다면 대단히 오만한 사람입니다. 내 생명이 내 것이 아니라 온 우주전체가 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나는 빌려온 생명의 원천의 기운에 의해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두 눈에서 볼 때는 나와 남이 다르고, 태극기와 촛불로 나뉘지만 우리 내면의 참 생명에서 볼 때는 나와 남이 결코 둘이 아닌 한 에너지입니다.

모든 생명은 모두가 주인공입니다. 하지만 촛불은 태극기를 인정하고, 태극기는 촛불을 인정해야 합니다. 생각이 다를 뿐 우리는 똑같은 형제입니다. 촛불과 태극기를 들고도 서로 토론할 수 있어야 하고 서로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인공으로 들어가는 자리입니다.

주인공은 감정의 세계에서 벗어나 내 본질을 불러주는 아름다운 언어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세상은 썩은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를 이뤄서 진리의 문에 들어가거늘.” 이 말이 쏙쏙 들어오지 않는다면 우리가 본질의 언어에 익어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괴테의 시 ‘하나’를 읊어 보겠습니다.
“모든 것이 제멋대로 구르는 듯해도 사실은 하나로 얽혀 있다네 / 우주의 힘이 황금종을 만들어 이들을 떠안고 있구나 / 하늘 향기 은은히 퍼져나가니 그 품에 지구 휘감기누나 / 모든 것이 향기를 좇아 조화로이 시공을 채우누나 / 휘몰아치는 생명의 회오리 속에서 나도 파도도 다 함께 춤춘다 / 삶과 죽음이 있건만 영원의 바다는 끊임없이 출렁이누나 / 변화하고 진동하는 저 힘이 바로 내 생명의 원천 / 오늘도 먼동이 트는 아침에 거룩한 생명의 옷을 짜고 있노라.” 
부처님이“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없고, 저것이 있으면 이것이 없다”는 말씀은 괴테의 시를 똘똘 뭉쳐서 완전히 빛을 나게 하는 연기법입니다. 우리는 이런 언어에는 설어 있습니다. 생각의 시는 읽는 만큼 빨리 받아들입니다. 이 같은 경전이 나에게 익숙지 않으면‘아! 내가 부처님 법이 많이 설어 있구나’를 깨닫고 많은 경전을 읽고 진리의 문에 들어가기 위해 정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오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조상들도 자식을 위해 살았지만 하지만 우리는 조상들의 이름조차 기억하는 분들이 계신가요. 자식들을 위한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과연 나는 나의 마음을 길들이고 있는가. 제 자신을 돌아보면 57년 동안 승려로 수행하는 동안 잠이라는 감정, 화라는 감정을 따라다니느라 소중한 시간을 많이 보냈습니다.

감정에 따라 다니는 것은 노예지 결코 내가 아니다
감정에 끌려 다니는 것은 업력에 의해 살았기 때문

감정이 사라진 그 사이 바람소리가 내 음악소리가 되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본래의 나로 돌아가서 빙긋이 웃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감정에 따라다니는 것은 감정의 노예이지 내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서산대사는 말씀하시기를 ‘눈 덮인 벌판을 지나는 나그네여! 갈팡질팡 걷지 마라. 오늘 내 발자국은 뒷사람들의 길이 이정표이니라.’

다른 모든 것은 참회하고 고치면 되지만 인생길은 어제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 하루 잘못 살았으면 영원히 잘못된 것입니다. 하루하루 산다는게 날마다 오는게 아닙니다. 단 하루 밖에 없는 소중한 시간으로 살아갈 때 내 삶이 되려면 내 안에 미운 마음, 원망하는 마음, 쉽게 포기하는 마음, 다 내려놓아 버리고 진리의 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여러분들의 존재가 전체가 부처라고 하셨습니다. 죄에 물들지 않습니다. 습관과 감정에 끌려다니는게 죄입니다. 감정이 일어나기 이전의 나의 참모습, 주인공으로 산다면 그 주인 자리는 허공에 물들지 않습니다. 주인공 그 자리는 영원한 광명 그 자체입니다. 그것을 놓아두고 아웅다웅 촛불이니, 태극기니 그렇게 싸우려만 하십니까.  

여러분의 촛불과 태극기가 내 마음에, 우리 가정에 각각 없는 곳이 없기 때문에 내 감정이 나를 끌고 다닙니다. 나는 어떤 말투를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이는 자기 자신이 똑바로 깨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 주인은 등지고 번뇌 망상으로 감정에 끌려 다니는 업력에 의해 살았기 때문입니다.  

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마음이란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우리는 눈으로 보는데 시간을  다 허비합니다. 제가 이 시계를 들어 보입니다. 무엇으로 보십니까. 눈으로 본다고 합니다. 자, 그럼 여기의 불을 끄면 이 시계가 보입니까? 안보입니다.

그래서 옛날 큰스님은 이를 육적(六賊)이라 했습니다. 번뇌를 일으키는 근원이 되는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을 도둑에 비유한 말입니다. 

최근에 서울에 사는 신도가 전화가 왔습니다. “스님, 요즘 너무 행복합니다. 서울 강남에 32평 아파트를 샀는데 스님은 강남에 와서 사는 기분 모를 겁니다. ”그러고는 6개월 뒤에 또 전화가 왔습니다. “스님, 요즘 통 살고 싶지가 않습니다. 여고 동창이 58평의 아파트를 샀다고 합니다.”그렇다고 자신의 아파트 평수가 작아졌습니까. 그대로입니다. 비교하는 한 생각 때문에 아주 작아진 겁니다. 

여기 백지가 있습니다. 여기다 1층, 2층을 그리다보면 비교가 생깁니다. 우리의 마음이 백지가 못되고 내 복이 32평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내 복이 32평이구나!’하고 생각하면 내 복이 그대로 있을텐데, 58평의 동창하고 비교하는 마음을 택하고 내니, 자기 아파트가 그만 작아져 버린 겁니다. 벌써 도적에 속은 겁니다. 

“남에게 비교하지 않으리라.”도적에서 벗어난 자리입니다. 비교하면 많은 손해를 봅니다. 우리나라가 잘사는 유럽의 나라보다 아파트가 큽니까? 일본하고는 게임도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먹는 것을 쫓아다니는 우리나라 의식주의 소비는 세계 3위 안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몇 위입니까. 몇 년 전 부탄이 1위 했을 때, 우리나라는 53위를 했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즐길 줄 모르면 그것은 행복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남과 비교일뿐입니다.  
그래서 야운 비구는 육적(六賊)의 도적을 쫓지 말라고 하였던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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