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사 창건으로 제주근대불교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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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사 창건으로 제주근대불교 시작됐다”
  • 김은희 기자
  • 승인 2017.03.17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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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탐라성보문화원 세미나 개최

한금순 문학박사 ‘제주근대불교사’ 주제발표 

탐라성보문화원이 근대 제주불교의 역사 정립을 위한 세미나를 열고 한금순 박사가 발표한 안봉려관 스님의 관음사 창건 시점을 근대불교의 시작으로 잡았다.

탐라성보문화원(이사장 허운 스님·원장 오홍식)은 지난 11일 적십자회관에서 근대 제주불교의 역사 정립을 위한 세미나를 갖고 제주근대불교를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1909년 안봉려관 스님의 관음사 창건으로 제주근대불교가 시작되었다.”

탐라성보문화원 세미나에서 주제발표를 한 한금순 박사는 제주근대불교의 시작을 안봉려관 스님의 관음사 창건으로 잡으면서 제주근대불교역사를 재정립하는 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본사 주지이면서 탐라성보문화원 이사장 허운 스님, 제주불교연합회장 관효 스님, 한국불교태고종 제주교구 종무원장 탄해 스님, 사)일붕선교종 제주교구 종무원장 제법 스님을 비롯해 도내 대덕 스님들과 김태석 제주도의회 길상회장, 유진의 의원, 김현민 문화체육대외협력국장, 안봉려관 선양회 김수진 이사장과 조명철 전 혜향문학회장 등 신행단체장들과 불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삼귀의례와 반야심경봉독, 격려사, 인사말 등이 이어진 후 본격적인 주제발표와 토론이 이어졌다. 

이사장 허운 스님은 격려사에서 “근대불교문화자료 정립 필요성을 들어 세미나를 개최하게 되었다”면서“앞으로 근대 역사를 여러 분야에 걸쳐 깊고 넓고 다양하게 정립해 나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관효 스님은 인사말에서 “근대불교 100년 역사를 재조명하면서 앞으로 제주불교가 나아갈 방향 설정을 위한 초석을 다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탄해 스님도 인사말에서 “생명이 탄생하기 위해선 알을 깨는 아픔이 있어야 한다”며 “앞으로 불교자료를 복구하고 되살리는 작업에 초심을 잃지 마시고 한마음 한뜻으로 좋은 결실을 맺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오홍식 원장은 “앞으로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스님들과 원로 불자님들 의견 반영해 나가면서 올바른 역사문화를 정리해 나가겠다”말했다. 

김태석 길상회장은 “모든 역사는 현재적 관점에서 재구성돼야 하며 제주민의 역사를 보기 위해서는 불교의 역사를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현민 문화체육대회협력국장 “종교문화와 역사문화에 대한 예산확보 어려움이 많은데 이에 더 많은 노력을 해나가겠다.”고 말했다. 

이어서 한금순 문학박사 주제발표에 이어 장성수 교수를 좌장으로 해서 성원 스님, 김석윤 스님의 후손인 김동호 전 신제주초등학교장, 오영호 봉려관선양회 부회장, 이병철 본지 편집부장 등이 참여한 주제 토론이 이어졌다. 이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금순 문학박사 주제 발표 내용
근대라고 할 때는 일제시대를 포함해 개항이후 1800년대 후반부터 해방이전까지이며 근대제주불교사라고 한다면 그때를 중심으로 한 제주불교를 가리킨다. 이 시기는 관음사 창건시기와 맞물린다고 할 수 있다. 매일신보, 김형식, 탐라기행 등에서 관음사 창건 기록들이 남아있다.

1909년 봄 창건되었고 1910년 통영군 용화사의 불상을 모셔왔다는 김형식 기록이 있다. 1918년 매일신보에 이틀간 ‘제주도 아미산 봉려관의 기적’이라는 기사를 통해 안봉려관 스님과 안도월 주지 스님에 대해 언급하였다. 한라산 순례기에도 안봉려관 스님은 1907년 대흥사로 출가해 1908년 관음사를 창건하였다는 사적이 있다. 이은상의 탐라기행에도 1908년 제주도에 온 봉려관은 1909년 초가암자를 지어 1910년 안도월 스님을 주지로 모시고 불상과 탱화를 이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안봉려관 스님과 관련된 창건 기록에 나오는 승운대사, 운대사 라고 표현된 스님은 김석윤 스님이라고 보여진다. 승운대사에게 법의를 전수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러 해석이 가능할 수 있으나 김석윤 스님이 1894년에 출가했고 상운 스님이라고 불리웠다. 김석윤 스님의 스승이신 박만하 스님이 용화사에 오랫동안 계신 기록이 있고 용화사에 1910년 탱화교체기록이 남아있으며 거기에‘안봉려관’ 이름이 기록되어있다. 누각이 해월루 라는 이름을 붙인 연유를 봐서도 그렇다. 김석윤 스님은 1902년 사교과를 마치고 1910년 안거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그 후에 1909년 관음사 서무를 봤다는 기록과 1910년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의병활동으로 감옥에 갔다가 유림의 탄원서를 내서 풀려났다. 그 후로는 활동이 불가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10년 용화사 안거 기록은 관음사 창건에도 일정정도 역할을 했다고 보여진다. 

근대불교에는 어느 정도의 사찰이 있었나를 생각해 보면. 사찰령에 의해 절차를 밟지 않은 절도 있었지만 86개 정도가 사찰 활동을 하고 있었다. 자료에 근거하여 집계한 수치로 47개가 허가를 받은 사찰이고 39개가 허가를 받지 않고 활동한 것으로 보고 있다. 관음사는 1909년부터 공식적인 활동을 했다고 보여진다. 그 이전부터 터를 닦았기 때문에 한 두 해 앞당길 수 있다. 

근대제주불교인물 열 분을 꼽는다면 관음사와 법정사 불탑사 등을 창건한 안봉려관 스님과 법정사항일운동을 주도한 스님들의 스승인 박만하 스님. 훈장이었으며 출가한 의병활동을 한 김석윤 스님. 그리고 강창규, 김연일, 이회명, 오이화, 이일선, 이세진 스님을 꼽을 수 있다. 

 

△약천사 주지 성원 스님
법정사 항일운동은 기념비적인 사건인데 지금은 법정사가 실질적인 사찰로서의 기능은 없고 그냥 하나의 기념관으로만 존재한다는게 안타깝다. 한국근대불교가 해방이후 전래되었다는 것과 함께 남방전래설이 가야 불교와 백제 불교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여지는데 그러한 연구들이 미진해 더욱 아쉽다. 

 

△오영호 봉려관선양회 부회장
20년 전부터 서원을 세워 연구를 하고 있는 봉려관선양회에서는 행적비 건립과 전국 불자들을 대상으로 신행수기공모를 하고 있다. 하지만 한금순 박사의 운대사에 대한 지적은 좀더 구체적이고 확실한 근거를 갖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기록에 의하면 한 노인이 나타나 가사를 전했다고 하는데 당시 석윤 스님은 사미계를 받은 스님으로서 43세의 나이인데 노인이라고 말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김동호 전 신제주초등학교장
주권을 모두 빼앗긴 과정에서 의병활동의 중심에 서서 활동하던 김석윤 스님에 대한 기록이 왜 없는가를 묻는다면 집안에서는 장자를 살리기 위해 모든 기록을 없앴기에 현재 남아있는 기록이 없다. 친척 할머니들은 작은 일이 터질 때마다 순사들이 달려왔다고 이야기를 전한다. 항일이력을 가진 김석윤 스님과의 연관성을 부정해야만 살아갈 수 있었던 시기였다. 김석윤 스님에 이어 덕수, 성수, 인수 세 아들이 출가했고 적명스님, 제아 스님 등 후손들이 출가를 했다.

 

△이병철 본지 편집부장
시대에 맞춰 불교도 변화해야 한다. 안봉려관 스님에 관한 창건 설화나 스님의 세운 사찰 등이 제주도에 많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매력있는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봉려관 스님 순례길이나 김석윤 스님과 관련된 불교사적을 따라 간다면 제주불교 100년의 역사를 엮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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