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타까왁가 (stn 4:2)
상태바
앗타까왁가 (stn 4:2)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03.17 10: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초기경전으로의 초대

《경전》

산냐[想]를 완전히 알고서 격류를 건너야 하나니

성자는 갈애와 견해의 집착에 더럽히지 않으며

번뇌의 화살을 뽑아내어 버리고 방일하지 않고 유행하나니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바라지 않는다.

【해설】

세존께서는 인간 개개인은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五取蘊]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이 몸뚱이-신체의 무더기를 색온(色蘊)이라고 하고, 정신의 무더기를 느낌[受], 인식[想], 의도[行], 알음알이[識]의 네 가지로 해체하여 그 법의 성질을 파악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사람은 눈·귀·코·혀·몸의 다섯 감각기관을 통해 매순간 바깥 현상과 접촉합니다. 마음[識]은 허공과 같아서 아무런 조건 없이 만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대상을 아는 것으로 그칠 뿐, 어떻게 반응하거나 무엇을 꾸미지 않습니다. 마음이 대상을 알고 나서 괴로워하거나 즐거워하는 것은 수受라는 느낌이 하는 것이고, 생각하는 것은 상想이라고 하는 지각이 하는 것이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행行이라는 의도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란 놈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공부가 불교의 마음공부인 것입니다.

“나는 편안하다, 행복하다, 슬프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느낌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 되는데, 이런 심리상태는 피안으로 가는 길에 첫 번째 장애가 됩니다.

빠알리어의 산냐(saňňā)는 우리말로 지각 혹은 관념작용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를테면 상想을 파랑, 노랑, 빨강, 하양과 같이 색깔을 지각하는 능력이라고 비유하고, 식識을 우리가 음식을 맛볼 때 이것이 ‘맵다, 쓰다, 달다, 시다.’를 아는 능력이라고 비유하여 법을 설하였습니다. 음식의 맛이 달고 맵다는 것을 아는 것은 개인적이고 체험적이고 실제적인 앎이지만, 반면에 ‘희다, 붉다.’하고 아는 것은 명칭-개념, 관념에 의한 앎으로 사회적, 문화적으로 형성된 것들입니다.

‘이것이 나의 관점이다, 나의 생각이다, 나의 의견이다.’와 같은 말은 내 자신과 관념이나 이념과 지각을 동일시하는 표현들입니다. 세존께서는 상想을 아지랑이, 신기루에 비유하여 말씀하시면서 때로는 이 관념을 자기 동일시하여 집착하게 되면[見取] 그 관념이나 이념을 위하여 목숨까지 희생하고 전쟁을 불사한다고 강조하십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관점과 자기 정체성을 동일시하여 스스로를 ‘자본주의자니, 공산주의자니, 사회주의자니’라고 내세우거나 보수주의자 또는 개혁진보주의자임을 드러냅니다. 정치에서는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원수가 되기도 하는데 이런 관념이나 이념이라는 것은 주변 사정의 변화에 따라 수시로 변해 고정 불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말해줍니다.

예를 들어 감귤 하나를 놓고 의사는 다른 과일과 비교하여 그 영양가에 대해서 생각할 것이고, 농민은 판매가를 생각할 것이고, 정치가는 감귤가를 유지하기 위해 오렌지의 수입허가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것과 같습니다.

대한불교 조계종의 소의 경전인 금강경에는 산냐[想, 相]를 극복하라는 부처님의 고구정녕하신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본경은 부처님의 초기 가르침이 실린 숫따니빠따 4장에 있는데, 상想과 견見에서 자유로울 것을 설하고 있다는 점에서 금강경과 상통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아직도 ‘대승이니 소승이니, 간화선만이 최상승의 선이다.’라는 말을 떠벌인다면 비록 출가 사문이라 하더라도 상견(相見) 중생의 덫을 벗어버리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밧줄도 없이 사람을 스스로 묶는 것이 바로 상想과 견見임에도 우리 범부중생들은 ‘내 것’이라는 관념의 노예로 살고 있습니다. 임제 선사께서는 이를 무승자박(無繩自縛)이라 비유하였습니다.

금강경에서 산냐의 덫에 걸린 자는 구경의 해탈을 실현하지 못하고, 참으로 산냐를 극복한 수행자라야 할 일을 다 마친 출격대장부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팔정도의 중도는 산냐의 놀음을 억제시키고 마음을 고요하게 평온하게 합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도(道) 가운데 불사(不死)로 인도하는 팔정도가 최고로 안전하네.”라고 감흥어를 읊으셨습니다. ≪중부의 마간디야 경≫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