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어 가짐 경 (AN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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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어 가짐 경 (AN2:13:7)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03.17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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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경전으로의 초대

《경전》

“비구들이여, 두 가지 나누어 가짐이 있다. 어떤 것이 둘인가? 재물을 타인과 함께 나누어 가짐과 법을 타인과 함께 나누어 가짐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가지 나누어 가짐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 두 가지 나누어 가짐 가운데 법을 타인과 함께 나누어 가짐이 뛰어나다.”

【해설】

초기경전 여러 곳에서 부처님께서는 인간이나 천상에 다시 태어나는 방법으로 보시와 지계를 말씀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보시의 종류를 크게 재물 보시와 법(dhamma) 보시로 나누어 말씀하시면서 재물 보시 중, 최상의 공덕은 여래․아라한․정등각께 보시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물론 출가사문께 올리는 네 가지 공양물[四事供養]보시도 그 공덕이 매우 수승합니다.

보시는 남에게 베푸는 마음입니다. 따라서 내가 베푼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고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보시를 해야 합니다. 이를 일컬어 무주상보시라 말합니다. 재물 보시보다 더 수승한 공덕을 가져오는 것이 법보시라는 본경의 가르침은 「금강경」 15. 지경공덕분(持經 功德分)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현 김승석 엮음

“그런데, 참으로 수보리여, 선(善)남자들이나 선(善)여인들이 이 법문을 배우고 마음에 간직하고 독송하고 이해하고 남들에게 설명해 준다면 수보리여,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써 그들을 안다. 수보리여, 여래는 부처의 눈으로써 그들을 본다. 그들 모두는 측량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의 무더기를 쌓고 얻게 될 것이다.”라고 …

금강경에서는 칠보로 하는 재물보시나, 신명(身命) 및 등신(等身)보시 조차도 수지독송(受持讀誦)의 공덕에 비할 바 못된다고 쉼 없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최근 유력 일간지는 사경(寫經) 붐을 소개하면서 예전의 신행이나 수행 차원에 머물렀던 사경이 점차 번뇌 멈춤과 힐링의 방편으로 대중들 속으로 펴지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불교뿐만 아니라 개신교, 천주교, 원불교 등 각 종교에서 사경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현재 사경을 한 번이라도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만도 300만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는 것입니다.

「법화경」에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기억하고[受持], 읽어주고[讀], 시로 읊어주고[頌], 알기 쉽도록 설명해주고[解說], 써서 남에게 주는 것[寫經], 이 다섯 가지 법보시에 헌신하라고 교계(敎誡)하고 있습니다.

초기경전의 주석서에 의하면, 인천(人天)을 막론하고 출가사문의 반열(성자)에 오르지 못한 모든 중생을 범부라고 말합니다.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은 중생으로 하여금 성자가 되게끔 하는 신행체계라는 것입니다. 전법도생(傳法度生)을 대한불교 조계종의 종헌에서 정한 뜻도 여기에 있습니다.

중생이 사는 개념적 세상을 현장으로 보고 그 현장을 개선하고자 하는 것이 현실의 정치요 경제요 문화예술이라고 한다면, 불교는 중생이라는 관념이나 세상이라는 개념을 해체하여 지금 · 여기의 법[現法]을 알고 보아 해탈, 열반을 성취하라고 가르칩니다. 어떻게 세상을 이롭게 할 것인가에 더 관심을 둔다면 눈먼 범부의 신세를 면할 수 없습니다.

세존께서는 세상을 법으로 해체해서 보아야 깨달음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해체하셨는가? 명칭 또는 개념[施設, 빤냣띠]을 해체하셨습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사상(四相), 즉 자아 - 개아 - 중생 - 영혼이라는 개념 또는 관념을 해체하셨습니다. 나라는 개념적 존재는 오온으로, 일체 존재는 12처로, 세상은 18계로 각 해체해서 보고, 생사문제는 12연기로 해체해서 보라고 설하셨습니다. 개념에 속으면 그게 바로 생사(生死)에 엉키고, 법(蘊-處-界-緣)으로 해체해서 보면 생사를 초월합니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수많은 경전을 수지, 독송하더라도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법, 즉 무더기[蘊], 요소[界], 감각장소[處], 조건[緣] 등을 파악하고 질문하고 배우고 호지하고 반조하지 못한다면 법을 보고 알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즉 눈먼 범부는 법보시를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섯 감관을 통해 “내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한다.”하는 식으로 감각 경험을 자기와 동일시하게 되는데, 부처님께서는 어떤 감각대상물을 인지하고 또 즐기는 나·자신·자아·영혼이라는 것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 또는 ‘내 것’을 여윈 그 자리를 알고 보아 일상에서 실천하는 자는 거센 흐름을 건너 피안에 이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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