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쩰라 깟사빠 경 (SN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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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쩰라 깟사빠 경 (SN12:24)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03.17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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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경전으로의 초대

《경전》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 라자가하에서 대나무 숲의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무셨다. 나체로 고행하는 수행자 아쩰라 깟사빠가 세존께 다가가서 이렇게 여쭙다.

“존자 고따마여,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입니까?”

“깟사빠여, 그렇지 않다.”

“존자 고따마여, 그러면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입니까?”

“깟사빠여, 그렇지 않다.”

“존자 고따마여, 그러면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

는 것입니까?”

“깟사빠여, 그렇지 않다.”

“존자 고따마여, 그러면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니고 우연히 생기는 것입니까?”

“깟사빠여, 그렇지 않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괴로움이란 없습니까?”

“깟사빠여, 괴로움은 없는 것이 아니다. 깟사빠여, 괴로움은 있다.”

“그렇다면 고따마 존자는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합니까?”

“깟사빠여, 그렇지 않다. 나는 참으로 괴로움을 알고 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부디 제게 괴로움에 대해서 가르쳐 주십시오.”

“깟사빠여, ‘그가 짓고 그가 그 과보를 경험한다.’고 한다면 처음부터 존재했던 괴로움을 상정하여 ‘괴로움은 스스로가 짓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되어 이것은 상견(常見)에 떨어지고 만다. 깟사빠여, ‘다른 사람이 짓고 다른 사람이 그 과보를 경험한다.’고 한다면 느낌에 압도된 자가 ‘괴로움은 남이 짓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되어 이것은 단견(斷見) 떨어지고 만다.”

“깟사빠여, 이러한 양 극단에 의지하지 않고 중간에 의해서 여래는 법을 설한다.”

【해설】

본경에 나오는 외도 수행자는 개인의 정체성을 유지시켜주는 자아는 영원한 것인가[常見], 아니면 죽으면 몸이 해체되어 단멸하고 마는 것인가[斷見]라는 고대 인도철학적 사유에 근거하여 괴로움은 자기가 일으키고 경험하는지, 아니면 자기가 일으키고 남이 경험하는지 등에 대하여 큰 의문을 품고 있던 참에 본경에서 세존께 그 해답을 구하는 질문을 합니다.

세존께서는 일어나는 괴로운 느낌과 느끼는 자(경험하는 자)가 같다고 한다면 괴로움은 스스로가 짓고 스스로 체험하는 것이 되어 상견(영원주의)에 빠지게 되고, 반면에 느낌과 느끼는 자가 다르다고 한다면 괴로움을 체험하는 자와 고통을 야기하는 자가 달라서 단견(허무주의)에 빠져 일체를 남의 탓으로 돌려서 윤리가 무너질 우려가 있음을 경고하시면서, 나체수행자의 잘못된 사유와 믿음을 고쳐 바로잡게 하셨습니다.

세존께서 양자택일의 답을 거부하고, 감각접촉을 통한 괴로움[苦]의 연기적 발생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세존께서는 “이 모든 세상은 있고 항상 존재한다.”는 관념, 이와 달리 “이 모든 세상은 없고 단멸한다.”는 관념은 모두 삿된 견해로서, 유위법(有爲法)들에 대하여 있다거나 없다는 유무(有無)의 관점에서 관찰하여서는 아니 되고, 제법(諸法)의 일어남과 사라짐의 입장에서 관찰하여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의 가르침은 윤회 과정에서 개인의 정체성을 유지시켜주는 ‘참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연기법의 존재로서 인간은 3차원 형상의 세계에서 대상을 지각하고 그에 대한 느낌이 생기면서 ‘자신이 존재한다.’라는 환상을 갖게 될 뿐입니다. 그러나 이는 존재론적 관념에 불과하고 실상이 아닙니다. 

괴로움을 소멸시키려면 느낌을 알아차리는 명상수행을 하여야 합니다. 느낌을 존재하는 그대로 관찰하여 휩쓸리거나 저항하지 않는 채로 그 본질을 통찰하는 것이 느낌명상입니다. 조건에 의해 일어난 느낌은 조건에 의해서 사라집니다.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이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임을 알고 보는 지혜, 이것을 깨닫는 수행이 팔정도이고 이를 중도(中道)라 합니다.

/ 유현 김승석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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