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전등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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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전등사 (1)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03.24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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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사찰순례(36)

우리나라에는 3,500여 개의 섬이 있다. 그 중 15퍼센트 정도인 약 500개의 섬에 사람이 산다. 우리에게 익숙한 추자도, 진도, 완도, 울릉도, 거제도, 백령도는 모두 사람이 사는 유인도이다.

크기로 따지면 제주도가 가장 크고, 그 다음으로 거제도, 진도, 강화도, 남해도 순이다. 섬들 중에는 과거에는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지만 최근에는 육지와 가까이 있는 섬이 다리로 연결되어 섬이 아닌 육지가 된 곳이 많다. 배를 만드는 조선소로 유명한 거제도, 통일신라시대 장보고가 청해진을 세운 곳이자 최대의 굴 양식장이 있는 완도, 고려시대 삼별초가 제주도로 쫓겨 오기 전 머물었던 진도, 해수관음성지 보리암이 있는 남해도, 인천공항이 세워진 영종도 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섬 중 강화도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어 주말에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 명소이다. 강화도는 고려와 조선의 수도인 개성과 서울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우리나라 역사책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섬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섬 중 네 번째로 크고 몽고가 침입한 고려시대에는 궁궐이 세워졌던 곳이므로 섬 안에 사찰이 여러 곳 있다. 그 중 가장 크고 대표적인 사찰이 바로 전등사다.       

1232년 몽고가 고려의 수도인 개성을 공격하자 당시 왕인 고종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최우는 해전에 익숙하지 않은 몽고군과 계속 항전하기 위해 궁궐을 강화도로 옮긴다. 하지만 몽고군의 말발굽은 강화도를 제외한 전국의 백성들을 유린하고 대구 부인사에 있던 초조대장경과 경주 황룡사 구층탑 등 헤아릴 수 없는 문화재가 불타 없어진 것도 이때이다. 강화도에 갇힌 고려 왕실은 민심을 수습하고 부처님의 가피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대장경 판각작업을 하는데, 이때 만들어진 것이 바로 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판이다. 당시 몽고는 요즘의 미국처럼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다. 송나라는 물론 중앙아시아와 아랍에 있는 많은 나라들은 몽고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속국이 되거나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파괴된 것을 고려하면 작은 나라 고려가 39년 간 항쟁한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내부 문제로 최씨 정권이 몰락하자 피폐해진 고려 왕실은 몽고와 화친하기로 결정하고 1270년 개경으로 돌아간다. 

전등사는 강화도에서 가장 큰 절이다. 단군의 세 아들이 세웠다는 삼랑성(일명 정족산성) 안에 자리한 전등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942년에 쓰인 「전등사본말사지」에는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에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본래 이름은 진종사(眞宗寺)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삼국시대로 올려 볼 수 있는 유물이 하나도 없고, 39년 간 고려의 임시 수도에 대한 『고려사(高麗史)』 기록에도 전등사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고, 진종사는 북한 지역에 있는 절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아도화상의 창건설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흔히 그렇듯 사찰의 창건 연대를 올려잡아 사찰의 역사가 유구했음을 강조하는 기록으로 여겨진다. 『고려사(高麗史)』에는 1259년(고종 46) 삼랑성 동쪽에 임시로 궁궐을 짓고 1264년(원종 5) 그곳에서 법회을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전등사 서북쪽에 위치한 실록을 보관하던 정족산 사고 아래에 고려 가궐터가 있다. 가궐은 풍수지리에 근거해 만든 말 그대로 가짜 궁궐이다. 왕이 거처하지 않아도 평상시처럼 금침을 깔고 의복을 놓아두었다고 한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정화궁주(고려 충렬왕의 원비)가 승려 인기(印奇)를 시켜 송나라의 대장경을 가져와 전등사에 보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고려 말 문인 목은 이색(李穡)이 1389년부터 1391년 사이에 강화도를 여행하면서 쓴 시에 전등사가 정화궁주의 원찰이라고 밝히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빌기 위해 궁궐 안팎에 여러 사찰을 세워 운영하였다. 이러한 기록과 남아있는 유물들을 통해서 보면 전등사는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하여 몽고에 대항하던 시기에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전등사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삼랑성(정족산성) 안에 있는데, 성의 남문과 동문 두 곳으로 들어갈 수 있다. 두 곳 중 남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빠르고, 남문에만 성루가 있어서 더 운치가 있다. 1605년(선조 38)과 1614년(광해군 6) 두 번의 화재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고 현재의 건물들은 그 이후에 지어진 것들이다. 그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는 광해군 때 지어진 대웅전(보물 178호)과 약사전(보물 179호)이 있는데 둘 다 작지만 단아한 기품이 돋보이는 건물이다. 이외에 보물로는 중국 송나라에서 만들어진 전등사 범종(보물 393호), 대웅전에 모셔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보물 785호), 명부전에 모셔진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보물 786호), 전등사 묘법연화경목판(보물 1908호)이 있다. 

남문으로 대웅전을 향해 올라가다보면 왼쪽에 수백 년 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들이 있다. 구불구불한 멋들어진 소나무들도 많은데 소나무 몸통을 자세히 보면 커다란 상처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송진을 얻기 위해 도려냈던 상처다. 전등사 범종도 공출이란 명목으로 빼앗겼었는데 해방 후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되어 원래 장소로 돌아왔다. 나라에 힘이 없으면 백성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식물과 유물 등 모든 것이 수난당하는 것을 생생히 볼 수 있다. 한편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길 오른 편에는 수 년 전에 만든 손잡이를 잡아 돌리면 경전 한 권을 읽는 공덕을 얻을 수 있다는 윤장대가 있다. 공덕을 얻으려는 사람이 많아서인지 자주 고장이 난다. 거기서 동문 쪽으로 조금 가면 작은 비각이 있는데, 옆으로 새는 것 같아 가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만 반드시 가서 보자. 비각 안에는 양헌수 장군의 승전비가 있다. 1866년(고종 3) 대원군이 프랑스 신부들을 처형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다. 이때 양헌수(1816~1888) 장군이 바로 이 정족산성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프랑스군을 물리친다. 그 승리를 기념하는 비석이다. 양헌수 장군은 1865년(고종 2)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전판관 백기호의 탐학을 보고하고, 태풍 피해를 복구하고 진휼을 요청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서 도민들의 칭송을 받은 목민관이다. 

이처럼 전등사에는 우리 역사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들이 많다. 부처님을 뵈러 갈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의 역사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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