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지으며 감동 깊게 읽은 대승경전이 다 거짓이라니…
상태바
눈물지으며 감동 깊게 읽은 대승경전이 다 거짓이라니…
  • 이병철 기자
  • 승인 2017.04.07 12: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적명 스님 지상법문

제주불교신문(대표이사 허운 스님)이 ‘진리를 찾는 순례길서 我를 보다’라는 주제로 성지순례를 주최한 가운데 지난 25일 대한불교 조계종단의 종립선원인 문경 봉암사를 참배했다. 
이날 제주출신 봉암사 수좌 적명 스님이 제주불자들에게 들려준 법문 내용을 요약 정리한다.<편집자 주>

 

제주출신으로 ‘수좌 중에 수좌’로 칭송받는 적명 스님은 고향에서 온 제주불자들을 반겼다. 적명스님의 법문을 경청하고 있는 제주순례자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제 고향이 제주입니다. 제가 21살에 출가를 했으니 어느덧 제주에서 뭍으로 나온 지가 60년 가까이 되네요. 고향이라는 것은 참으로 묘해요. 마음 한 구석에는 늘 잊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고향 여러분들께, 불교의 핵심에 대해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제가 28살에 되던 해에 성철 스님을 뵈러 해인사를 처음 갔습니다. 당시 성철 스님도 파계사에 계시다가 친한 도반인 자은 스님이 계셔서 해인사에 주석하고 계셨습니다.

제가 성철 스님을 뵙자 처음부터“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왜 보자마자 그 질문을 드렸냐하면 제가 출가 후 처음 대승경전을 봤는데 대승 경전 이야기들이 부처님의 사실 그대로 기록한 것으로 알았어요. 부처님이 기원정사에서 하신 말씀과 사리불과 주고받는 이야기에 부처님을 신처럼 느껴질 정도였고, 어떤 부분에선  감동이 밀려와 목이 메고 눈물이 날 지경이었어요. 그래서 경전을 제대로 못 읽을 정도였어요. 

그런데 대승경전이 부처님이 친히 설한 것이 아니고 부처님이 입적 후 한참 후에 만들어진 경이라는 것을 알고 속은 느낌이랄까? 사기 당한 느낌이랄까? 그렇게 눈물지으며 감동 깊게 읽었던 경전이 다 가짜라는 생각에‘스님 노릇을 그만해야 하나’라고 회의감까지 들었어요. 그래도 내 자신을 설득하고 용맹정진하면서 마음은 진정됐는데 의심의 뿌리는 없어지지 않았어요.

성철 스님이 저보다 27살 위셨으니까 40대 후반이셨을 겁니다. 내가 이제 80이 다됐으니까(웃음). 성철 스님은 선과 교를 겸해 박학다식하셨고, 이미 유명하셨어요. 내 의심 덩어리를 던질 선지식을 발견한 셈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철 스님께 인사를 하자마자“대승비불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으니 스님은 마치 그 질문을 기다렸던 사람처럼 그 심한 경상도 사투리로 답을 마구 쏟아냈어요.(웃음)

성철 스님은“대승비불설이 부처님의 진설이 아니라는 것은 맞기는 맞아예. 그러나 대승불교 사상이 부처님 사상이 아니라면 그것은 무지의 소치”라는 내용이었어요. 당신이 늘 부처님이 최초의 법문이라고 틀림없다고 일컬어지는 초기경전은 사제법문, 12연기, 중도 사상이 핵심입니다.

법문을 하고 있는 적명 스님.

초기 가르침의 핵심은 중도입니다. 대승불교의 백미는 법화경과 화엄경입니다. 본질적인 핵심도 중도사상입니다. 그러니까. 초기 부처님의 핵심도 중도고, 대승불교 사상도 중도입니다.

그래서 처음과 끝이 하나이기 때문에 대승불교 사상이 부처님 사상이 아니라는 것은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 성철 스님의 설명의 요지였습니다. 

제가 열심히 말씀은 드리겠는데 이런 얘기를 하면 10분 이내에 다 졸더라고요. 그래도 비싼 돈 들이고 비행기 타고 왔으니까 졸지 않을것으로 알고 고향 친구들을 믿고 말씀드리겠습니다.(웃음)

본격적으로 중도를 논하는 경론은 문수보살입니다. 어떻게 중도를 설명하느냐면 양변이 중도다. 양 변이 뭐냐면 갓머리 변자입니다. 있다는 것도 변이고, 없다는 것도 변입니다. 중생이라는 것도 변이고, 부처라는 것도 변입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입니다. 상대성이 있는 것은 다 변입니다. 그러면 중간은 변이 아니냐고 질문할 수 있어요. 중간도 변입니다. 이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길에 굴러다는 돌은 뭐하고 상대입니까. 돌멩이 아닌 것과 상대입니다. 그러니까. 상대 아닌 것을 찾지 않을 수 없어요. 차별성입니다. 차별은 존재의 뜻입니다. 

예를 들어 뒤에 커다란 칠판이 있어요. 하얀 시험지를 딱 붙여 놓았습니다. 이 하얀 시험지가 잘 보이나요. 그러면 잘 보일 것입니다. 다음에는 칠판에 흰 시험지 주변으로 흰색을 칠하면 흰 시험지가 잘 보이나요? 잘 안보이겠죠. 똑 같은 색이면 구분이 안되듯이 말입니다. 

시험지 한 장을 들어서 보면 시험지 그 자체로 존재하는 줄 알아요. 나는 내 자신으로 존재하는 줄 알아요. 돌멩이가 있으면 그 하나 때문에 존재하는 줄 믿어 의심치 않잖아요. 그런데 예를 들면 흰 종이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게 아니고 칠판이 그 색을 구분지어 주니까 그 흰색이 도드라져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완전한 내 혼자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아니다 입니다. 주위에 내 아닌 것들이 도와줘서 내 존재가 빛나는 것입니다. 이게 불교의 중도이고, 연기법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차별이 없으면 존재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차별이 없어져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중도라는 것은 차별이 없는 것이다. 존재가 아니다라는 결론이 납니다.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인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중도라는게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중도라는 것은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차별성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중도는 알 수 없는 것이 됩니다.

“화엄경’의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깨달음을 친견하고 나서 문수보살의 지시를 받아서 깨달음의 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문수보살이 남쪽의 선지식을 찾아 선재동자에게 떠나면서 배울 것을 권합니다. 처음에는 덕운 스님을 찾아가라 합니다. 덕운 스님은 묘봉이라는 산 정상에 있는데 선재동자는 과거에도, 현재도, 미래에도 그 곳에 계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묘봉을 찾아가도 스님이 계시지가 않아요. 경전에 보면 일주일을 찾았다고 그래요. 선재동자가 스님을 못 뵙고 내려오는데 다른 두 번째 봉우리에 계셨던 것입니다. 

결국 덕운 스님을 찾아갑니다. 이 내용을 어떻게 정리가 되냐하면 ‘진리라는 것은 정면돌파만 하면 볼 수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방편을 통해 다른 면도 볼 수도 있다는 그런 뜻을 나타낸 것입니다. 진리에는 여러가지 면모가 있다는 겁니다. 동쪽도 있고, 서쪽도 있다. 진리도 이와 같은 면이 있어서 정면으로 본질을 파악하려면, 다른 쪽으로 접근을 하면 보지 못할 것도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화엄경에서는 덕운 스님을 통해 이 같이 진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중도라는 것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파악이 안된다’는 것은 중도에 대한 정면돌파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알 수 없습니다. 볼 수 없습니다. 방편을 갖고 중도를 알 수 있는 방법으로 접근을 하면‘중도는 불이성(不二性)이다’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불이성이란 말은 둘이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어려운 것만은 아닌데 제가 동전을 들었다고 상상해 보세요. 제가 여러분께 이것이 무엇입니까 물으면 여러분들은 “동전이요”그럴 겁니다. 뒤집어서 다시 물으면 역시 “동전이요.”앞으로 뒤로 봐도 동전입니다. 이것을 불이성이라 합니다. 다른 것을 하나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것을 아닌 것으로 보는 것, 다른 것을 같은 것이라 보는 것, 다 같은 소리입니다. 이것을 불이성이라 합니다. 

<다음호에는 불이성의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자타불이(自他不二)’에 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