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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 얹은 부악사 전각 3개소 4·3으로 모두 전소[4·3으로 잃어버린 사찰] 한경면 청수리 ‘부악사’

1933년 김경호 스님 창건…2대 주지 월봉 스님 
4·3재건 후 낙천 기원사 창건 및 영축사 재중건 

 

영축사 주지 광수 스님이 옛 부악사 터를 오르며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증언해 냈다.

제주4·3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과 소련이 주도한 냉전 이데올로기가 빚어낸 우리나라의 역사적 비극이다. 미군정기 제주도에서 발생한 4·3은 1947년 3·1절 기념식장에서 경찰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고있다. 1948년 4월 3일 무장대에 의한 봉기가 시작된 날로부터 1954년 9월 21일 제주도 경찰국장이 한라산 입산금지령을 해제하기까지 6년 6개월간 점령군에 대한 제주도민의 대중적 저항의 수난사라 할 수 있다.

제주불교도 그 광풍의 회오리 속을 피해갈 수 없었는데 제주4·3으로 인해 불교의 종교활동 자체가 중단되는 시련을 겪었다. 특히 제주불교 활동을 이끌었던 주요 승려들의 희생과 사찰의 피해는 치명적이었다. 

지난 2004년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에서 펴낸 ‘한국전쟁과 불교문화재-제주도편’에 따르면 제주시지역 사찰 26곳, 서귀포지역 사찰 9개소로 총 35개 사찰이 피해를 입었다고 자료를 발표했다. 하지만 피해 사찰은 이보다 더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많이 흘러버린 세월로 인해 그 피해를 증명할 수 있는 근거가 많이 소실됐고, 그 전체 전모를 밝히기가 어려웠다고 조사원은 밝히고 있다.

이에 본지는 ‘한국전쟁과 불교문화재-제주도편’에는 기록되지 않은 한경면 청수리‘부악사(현 영축사)’의 그동안의 취재를 하며 4·3사건의 피해사찰임을 밝혀냈고, 현 주지 영축사 광수 스님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그 당시의 참혹했던 피해 상황을 싣고자 한다.

 

월봉 스님이 4·3을 피해 판포 통천사에 봉안했다 다시 모셔온 목불.

청수리 가마봉은 남쪽의 큰 봉우리 등성이가 서북쪽으로 휘돌아 상봉, 중봉, 하봉이 ‘ㄷ’자 모양의 가마를 닮았다하여 가마오름이라 붙여졌다. 이 형세가 가마[釜]와 같다는 데서 가메 오름 또는 가마 오름이라 부른다. 그 가마봉 상봉 북녘 기슭에 자리했다하여 부악사(釜岳寺)라 불렸다. 부악사는 지난 1933년 갑술년에 김경호 스님에 의해 창건됐다. 당시 한경면에는 지난 1932년 제주불교 중흥조 안봉려관 스님의 의해 고산 월성사가 창건됐고, 1934년 양경수 거사의 부지를 시주받아 김화표 스님이 1934년 판포 통천사를 창건하면서 이 지역에 불법 홍포의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자연스럽게 중산간 지역인 저지와 청수의 불자들을 위한 불법도량‘부악사’의 창건은 이 지역 불심이 무르익었다는 방증이다. 

영축사 2대 주지 월봉 스님과 그 뒤에 상좌인 광수 스님.

경호 스님에 이어 2대 주지로 월봉 스님은 해남 대흥사에서 대교과를 수료 후 부악사에 감원으로 발령받는다. 4·3일 발발하기 이전이었다고 월봉 스님의 상좌였던 광수 스님은 부악사에서 대해 기억해 냈다.  

“청수 인근 낙천이 제 고향입니다. 당시 제가 10살 무렵이었는데 어머니를 따라 부악사 동지기도를 따라갔어요. 당시 부악사 위세가 가히 당당했습니다. 사천왕상이 그려진 일주문에 요사채 그리고 대웅전이 초가집이 아닌 모두 기와였어요. 저지와 청수는 물론 월림, 영락, 무릉에서까지 신도들이 기도처로 삼았기 그 위세가 어머 어마했어요. 기도 때가 되면 요사채와 법당 안이 신도들로 가득했어요.”

부악사는 전각 3개소가 기와집이었다. 이를 증명하는 기와 파편들

그러나 제주 최대의 아픔 1948년 4·3일 발발했고, 그해 10월 20일 ‘해안선에서 5km 이상의 지점과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하고 위반하는 자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총살한다’고 포고하게 된다. 부악사의 위세도 하루아침에 꺾이고 만다. 당시 월봉 스님의 친동생이 저지에 경찰로 근무할 무렵이었다. 동생은 하루 빨리 해안마을로 내려가야 한다고 알려줬고, 시급함을 알게된 스님은 모셨던 부처님(목조여래좌상)을 등에 짊어지고 판포 통천사로 피신하기에 이른다. 가만히 있었다가는 스님의 목숨도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결국 토벌대에 의해 위풍당당했던 부악사는 불 질러졌고, 폐사하기에 이른다. 그 흔적은 옛 기와만이 흩어져 그 당시의 위용을 증명할 뿐이다.

부악사가 폐사됨에 따라 월봉 스님은 이곳저곳 사찰의 기도 스님으로 있다고 대정 대승사 주지 비구님 스님이 입적하면서 대승사에 주지로 주석하게 된다. 그 무렵 광수 스님은 이름 모를 병고에 시달리게 된다. 월봉 스님은 침과 탕약에 능하셨는데 광수 스님의 모친은 아들을 살려야 한다는 내리사랑으로 낙천에 월봉 스님을 모시게 된다. 3주 동안 매일같이 침과 탕약을 끓여 결국 기적적으로 광수 스님은 새생명을 얻는다. 그 후 광수 스님의 어머니 제안으로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부처님을 봉안하자는데 마을 유지들이 뜻을 같이하면서 1954년 낙천에 ‘기원사’가 창건된다. 기원사에는 4.3으로 어쩔 수 없이 통천사에 모셨던 불상을 다시 기원사로 이운해 봉안하며 이 지역의 불법 홍포 메카로 삼는다.

“당시 한창 4·3재건으로 이동도 자유롭지 않았고 마을 대부분이 불에 타버려 자신 집조차 없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불자들은 자기 집은 못 짓더라도 기원사를 짓는 데는 모두가 동참을 했습니다.”

나라가 안정되어 가면서 부악사를 중건해야 한다는 신도들의 의견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 당시 관음회가 조직되었고, 당시 전소된 부악사 부지는 150평으로 협소했는데 크게 중창을 염두하고 현 영축사 부지를 매입한다. 1961년 임인년 오두막을 지은데 이어 1964년 을사년 초가 대웅전과 종각을 갖추고, 기원사의 불상을 다시 모셔오면서 여법한 옛 명성을 이으면서 다시금 불법이 피기 시작한다. 새롭게 불사를 중창한 만큼 부악사에서 사명을 개명, 영축사라 명명했다. 그 이유는 가마봉 인근에 큰 암석이 하나 있는데 그 인도 영축산에 있는 독수리 모습을 닮았다하여 ‘영축사’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이병철 기자  taiwan081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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