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始原)에게<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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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始原)에게<41>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04.21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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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초

                                                            이홍섭

벌초라는 말 참 이상한 말입디다, 글쎄 부랑무식한 제가 몇 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큰집 조카들을 데리고 벌초를 하는데, 이 벌초라는 말이 자꾸만 벌받는 초입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내 원 참 부모님 살아 계실 때 무던히 속을 썩여드리긴 했지만…… 조카들이 신식 예초기를 가져왔지만 저는 끝까지 낫으로 벌초를 했어요, 낫으로 해야 부모님하고 좀더 가까이 있는 느낌이 들고, 뭐 살아 계실 적에는 서로 나누지 않던 얘기도 주고받게 되고, 허리도 더 잘 굽혀지고…… 앞으로 산소가 없어지면 벌받을 곳도 없어질 것 같네요, 벌받는 초입이 없어지는데 더 말해 무엇하겠어요, 안 그래요, 형님.

『터미널』(문학동네, 2011)

 

일 년에 한두 번 문중 묘가 있는 용강에 벌초를 간다. 그때 먼 친척을 만나 나누는 대화는 언제나 똑 같다. 하는 일은 잘 되고 있는지, 아이는 잘 크고 있는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대답도 거의 비슷하다. 마치 풀들이 한 해를 주기로 무덤 위에서 자라다 베어지고 다시 또 자라듯. 한때 대처에 나갔다가 거의 십 년 만에야 어머니 무덤을 찾은 적이 있다. 나는 무덤 앞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지나는 사람이 언제 돌아가신 분이냐고 물어서 이십 년 정도 지났다고 대답하니까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너무 오랫동안 찾지 못한 죄는 살아생전 불효를 한 죄와 함께 무거운 눈물을 흘리게 한다. 시인은 예초기 대신 “허리도 더 잘 굽혀지”는 낫으로 벌초를 한다. 일 년에 한두 번 달게 벌을 받는다.
/현택훈(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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