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전등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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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전등사 (3)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04.27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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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사찰순례(38)

삼랑성 남문에서 올라와 전등사 대웅전을 보았으면 발길은 자연스럽게 대웅전과 나란히 자리 잡은 향로전, 약사전, 명부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향로전은 법당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궁에서 나온 상궁이나 나인들이 기도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상임법사실로 사용되고 있다. 마당에 핀 꽃들을 보며 지나가면 바로 대웅전과 함께 보물로 지정된 약사전(제179호)이 나온다. 건물이 만들어진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붕과 기둥, 처마 등의 모양(다포양식에 팔작지붕과 겹처마를 하고 있어 작지만 당당하고 화려한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 대웅전과 비슷하여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하는 기록으로 보면 1876(고종 13)년에 약사전을 중수하고 기와를 교체하였다고 한다. 이 1876년은 일본과 강화도에서 불평등조약을 맺은 해이기도 하다.  

약사전은 말 그대로 약사여래를 모신 법당이다. 약사여래는 동쪽에 있는 정유리 세계에 살면서 십이대원을 내어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시켜주는 의왕(醫王)이다. 약사여래를 염(念)하면 질병이 낫는다는 믿음이 의지할데 없는 민중들에게는 엄청난 힘이 되어서 약사부처님은 삼국시대부터 인기 있는 부처님이었다. 약사전에는 고려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이 모셔졌고 그 뒤에는 1884년 제작된 약사여래후불탱화가 걸려 있다. 역사여래의 양옆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앉아있고, 주변에는 사천왕이 표현되었다. 약사여래불상 왼쪽에는 현왕탱화가 걸려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난 뒤 3일째 되는 날 심판하는 현왕은 염라대왕을 모델로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우리나라에만 있는 신으로, 돌아가신 3일째 되는 날 망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현왕재를 올리기도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죽음과 질병은 인간에게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그러한 두려움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의지처가 필요했고 불교는 그러한 요구에 부응해왔으며, 현왕탱화도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약사전 옆에는 명부전이 있다. 명부전의 명부는 사람이 죽은 뒤 그 혼령이 가서 사는 곳을 의미한다. 따라서 명부전은 돌아가신 분이 지옥에서 고통 받지 않고 좋은 곳으로 가기를 바라는 사십구재 같은 재를 올리는 곳이다. 명부전에는 사자들의 죄의 유무를 심판하는 열 명의 대왕을 모시는데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불교에서는 열 명의 왕 ‘十王’을 십왕이라고 읽지 않고 시왕이라고 발음한다. 이 열 명의 왕은 ①진광대왕(秦廣大王), ②초강대왕(初江大王), ③송제대왕(宋帝大王), ④오관대왕(五官大王), ⑤염라대왕(閻羅大王), ⑥변성대왕(變成大王), ⑦태산대왕(泰山大王), ⑧평등대왕(平等大王), ⑨도시대왕(都市大王), ⑩전륜대왕(轉輪大王)이다. 이 중 다섯 번째 왕이 우리에게 익숙한 염라대왕이다. 이들은 인도 불교에는 없는 중국 도교에 있는 왕들이다. 즉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이후 중국 전통 사상과 결합된 것이다. 인도에서 불교가 처음 생겨나서 종교로 자리잡을 때 당시 가장 널리 알려진 종교인 브라만교의 최고 신인 브라흐마, 파괴와 죽음의 신인 시바가 불교의 범천과 제석천으로 수용된 것처럼 중국인들에게 익숙한 도교의 왕들이 불교에 수용된 것이다. 기독교가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박해를 받은 이유도 우리 전통 문화와 부딪쳤기 때문이다. 천주교의 경우 많은 이들의 순교를 통해 우리나라 문화를 이해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불교도 중국이나 한국에 들어와서 그 나라 전통 사상과 결합한 것이다. 새로운 종교를 포교하는데 그것이 유용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날로부터 49일까지는 7일마다, 그 뒤에는 100일, 소상, 대상까지 열 번에 걸쳐 명부의 각 대왕에게 살아 있을 때 지은 선악의 업을 심판받는다고 한다. 따라서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명부전(시왕전, 또는 지장전)에서 재(齋)를 모신다. 이러한 의례는 중국이나 우리나라가 조상을 숭모하는 전통이 강했기 때문에 중요한 불교 의례로 전승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등사 명부전 중앙에는 1636년에 제작된 보물 제1786호 목조지장보살상이 자리잡고 좌우에는 석장을 든 도명존자와 원통형 합을 받쳐 든 무독귀왕이 비서처럼 서 있다. 지장보살의 좌측에는 ①, ③, ⑤, ⑦, ⑨대왕, 우측에는 ②, ④, ⑥, ⑧, ⑩대왕이 의자에 앉아 있다. 지장시왕 외에 귀왕, 판관, 사자, 인왕 등의 권속들까지 망라해 군집을 이루는 명부전의 구성은 17세기에 유행했던 전형적인 모습이다.

명부전 옆의 종각에 매달려있는 범종도 전등사 답사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유물이다.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면 우리나라 범종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대부분은 이 종이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중국 송나라 때 만들어졌다는 소개문을 보고 놀란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종이 언제 어떻게 전등사까지 전해졌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종에 새겨진 글을 통해 이 종이 1097년 중국 하남성에 있는 백암산 숭명사라는 절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제 말기 일본이 전쟁 물자를 충당하기 위해 금속류들을 강제로 징발할 때 이 쇠로 만들어진 종도 빼앗겼다가 다행히 녹여지지 않고 부평에 있는 군기창에 보관되다가 전등사로 돌아오게 된 역사의 산물이다.

전등사 뒤편에 있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사고를 둘러보고 남문으로 내려가다가 다원 옆 화장실 뒷편에 돌벽으로 이루어진 반지하 공간은 반드시 들려봐야 하는 전등사 답사의 백미이다. 무설전이라는 이름의 이 법당은 2012년에 완성되었다.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전등사 경내에현대식 건물을 지을 수 없었기 때문에 반지하에 한국 불교가 시도한 적이 없는 새로운 모습의 법당을 만들어졌다. 전통 가옥을 짓는 목수들이 아닌 홍익대 미대 교수들이 주축이 되어 공간을 디자인하고 불상과 불화를 만들었다. 중앙의 불상은 금빛 대신 흰색 안료를 칠해 위압감을 없앴고, 부처님 옆의 보살들의 얼굴도 전통적인 모습이 아니라 아이돌 가수, 친근한 아줌마, 아저씨의 얼굴을 형상화했고, 머리가 큰 전통 불상과 달리 균형잇는 인체 비례를 따랐다. 천정에는 단청 대신 999개의 연등을 달고, 천정 전체를 1000번째 연등으로 삼았다. 사찰은 스님도, 신도도 불편하게 느끼지 않는 그 시대에 맞는 살아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주지스님의 생각이 반영된 기념비적인 법당이다. 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에서 누구에게나 열린 현대 불교가 새롭게 나아가는 모습을 확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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