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始原)에게<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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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始原)에게<43>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05.17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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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네 

                               신미나

 

장마 지면 정미네 집으로 놀러 가고 싶다. 정미네 가서 밍크이불을 덮고 손톱이 노래지도록 귤을 까먹고 싶다. 김치전을 부쳐 쟁반에 놓고 손으로 찢어 먹고 싶다.

새로 온 교생은 뻐드렁니에 편애가 심하고 희정이는 한 뼘도 안되는 치마를 입는다고 흉도 볼 것이다. 말 없는 정미는 응 그래, 싱겁게 웃기만 할 것이다.

나는 들여놓은 운동화가 젖는 줄도 모르고 집에 갈 생각도 않는다. 빗물 튀는 마루 밑에서 강아지도 비린내를 풍기며 떨 것이다.

불어나 흙탕물이 다리를 넘쳐나도 제비집처럼 아늑한 그 방, 먹성 좋은 정미는 엄마 제사 지내고 남은 산자며 약과를 내올 것이다. 

 

어렸을 때 같은 학교를 다녔던 요한이네 집에 가서 많이 놀았다. 방바닥에 누워 만화책을 읽고, 요한이 여동생 젬마와 함께 셋이서 부르마불을 하고, 라면도 같이 끓여서 먹었다. 그러다 배고프면 마당에 있는 비파를 따서 먹었다. 옆집에는 복선네가 살았다. 복선, 미선, 은선. 세 자매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 시에서는 “제비처럼 아늑한 그 방”을 따뜻하게 추억하면서도 뭔가 까닭 모를 슬픔이 스며있다. 날씨는 장마에, 강아지는 비린내를 풍기고, 엄마는 일찍 돌아가신 모양이다. 유년기를 지나면서 어쩔 수 없이 슬픔을 맞이하게 된다. 그 슬픔이 추억이 되어가는 게 세월인가.
/현택훈(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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