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월정사를 얘기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스님이 두 분 계시니, 바로 한암대종사와 탄허대종사이다. 사제 사이인 두 스님은 수행의 경지가 깊을 뿐만 아니라 글씨도 잘 써서 몇 년 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두 스님의 글씨를 모은 특별전시전이 열리기도 했다.
한암대종사는 1876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나 22세에 금강산에 유람을 갔다가 발심, 장안사에서 행름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고 이듬해 청암사 수도암에서 경허 스님의 법문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내원사, 건봉사의 방장과 조실로 머무르다 1925년 49세에 서울 봉은사 조실로 추대되었다. 그때 한 친일 승려가 일본 불교와 통합을 위해 도움을 청하자,‘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춘삼월에 말 잘하는 앵무새가 되지는 않겠다’고 하고 현재 월정사의 말사인 오대산 상원사로 들어간 후 입적할 때까지 27년동안 산문에서 나오지 않았다. 상원사에 들어간 후 수행인이 반드시 지켜야 할 본분인 승가오칙을 만들고 선포하였다. 승가오칙은 다음과 같다.
①선(禪) : 참선은 수행인의 본분이다, ②염불 : 염불삼매가 곧 선정이니 수행자는 염불을 해야 한다, ③간경(看經) : 수행인은 밝은 지혜와 중생을 교화할 만한 식견을 갖추어야 한다, ④의식(儀式) : 의식은 종교의 정신을 표현하는 행위이자 중생을 교화하는 행사이다. 의식이 없는 종교는 존재할 수 없다, ⑤수호가람 : 참선, 염불, 간경, 의식을 수행할 선근이 없거나, 부득이 이를 수행할 수 없을 경우 수호가람의 원을 세워 가람을 수호 보전하고 수행자를 외호한다면 선근이 익어 발심하게 된다. 1936년에는 현 조계종의 전신인 조선불교 조계종 초대 종정으로 추대된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오대산 일대에 있던 스님들도 일부만 남고 대부분 피난을 떠났다. 1·4후퇴 때 상원사에는 한암 스님과 그의 상좌인 희찬 스님, 공양주 평등성 보살만 남아 있었다. 후퇴하면서 유엔군과 국군은 중공군이 머무를 수 있는 곳을 없애기 위해 산속에 있는 절을 불태우는 작전을 세웠다. 그리고 군인들이 상원사를 소개하기 위해 들이닥치자 칠순이 넘은 노스님과 젊은 국군 장교가 실랑이를 벌이게 된다. 장교의 말을 들은 스님은 잠시 기다리라 말하고는 방에 들어가 가사 장삼을 차려 입고, 법당의 중앙에 가부좌를 하고 이제 되었으니 불을 놓으라고 한다.
“스님! 이러시면 안됩니다. 나오십시오.”
“나야 죽으면 어차피 다비할 몸이니 내 걱정 말고 어서 불을 지르시오.”
“스님! 제발 나오십시오.”
당시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이 실랑이를 보고 있던 상좌 스님과 공양주 보살은 군인들이 그대로 불을 지를까봐 제발 살려달라며 군인들에게 부탁한다. 이런 소란 속에서도 스님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대는 군인으로서 상부의 명령에 따라 불을 놓으면 되고, 나는 중으로서 마땅히 절을 지켜야 한다. 본래 중은 죽으면 그 몸을 태우는 것이니, 내 죽을 날이 멀지 않았으니 잘된게 아니냐?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불을 질러라.”
이처럼 몸을 바쳐서라도 절을 수호하려는 스님의 추상같은 의지는 군인정신으로 투철한 젊은 장교의 마음마저 움직였다.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명령 대신 문짝을 뜯어 태웠던 차일혁 경무관처럼 젊은 장교도 절을 태우는 것을 포기하고 문짝을 수십 개 떼어내어 마당에 쌓고 태워서 연기가 높게 올라가게 하여 멀리서 보면 상원사에 불이 난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후 불을 놓았다는 증거로 노스님의 죽비를 하나 가지고 상원사를 내려갔다. 한암 스님이 죽음으로 맞선 용기와 젊은 장교의 지혜로 말미암아 상원사가 전란 속에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그 결과 현재 우리나라에 전하는 범종 중 가장 오래된 국보 36호 상원사 동종, 세조대왕의 병을 치료했다는 국보 221호 문수동자상, 국보 292호 상원사 중창권선문이 오늘날까지 무사할 수 있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당시 그 군인 장교의 신상은 전하지 않는다. 한암 스님은 3개월 후 세수 76세로 상원사에서 앉아서 열반하였다. 마침 그때 상원사에 들른 정훈장교 김현기 대위가 스님의 열반 직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마지막 모습을 세상에 알렸고, 그와 육사 동기이자 정훈장교로 근무했던 소설가 선우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상원사〉라는 단편소설을 썼다. 이 소설을 통해 스님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졌다. 상원사의 본사인 월정사는 한국전쟁 중에 모두 불타버린다. 현재 월정사 건물은 1964년 한암 스님의 제자인 탄허대종사가 적광전 중건을 시작으로 하나 둘씩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탄허 스님은 독립운동가 가문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하다 오대산 상원사의 한암 스님이 불교와 유교, 도교에 회통한 도인이라는 말을 듣고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로 3년 간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1934년(22세)에 한암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한다. 이후 월정사에 머무르며 많은 책들을 간행하고 후진 양성에 힘쓰다 1983년 6월 5일 입적날을 미리 예언하고, 3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체무언’이라는 최후 유언을 남기고 입적하였다. 다비 후 사리를 수습하여 한암선사 부도탑 옆에 나란히 부도탑을 세우고 모셨다. 탄허스님은 불교뿐만 아니라 유학, 노장사상, 주역 등도 꿰뚫고 있어서 많은 학자들이 가르침을 원했다고 한다. 또한 호방한 글씨로 이름이 높아 그가 쓴 수십 여 곳의 사찰 편액이 전하고 있다. 월정사에 가면 그의 가르침을 받지 못한다 아쉬워하지 말고, 그의 깨달음이 경지가 배어있는 글씨를 찾아보는 것도 순례 여행의 묘미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