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평생 불심의 바다로 이끌어 주신 원문상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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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평생 불심의 바다로 이끌어 주신 원문상 스님
  • 이병철 기자
  • 승인 2017.06.08 14: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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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불교의 주춧돌, 당신을 모십니다 <2> - 조명철 前 혜향문학회장 <원문상 스님과 인연편> -

조 회장은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재학 시 제주대 교수로 재직했던 진원일 스님으로부터 동양문학을 사사했고, 그 인연으로 당시 고등학생과 대학생의 연합체인 제주불교학생연맹 회장을 맡기도 했다. 이어 태고종 제주교구 신도회장, 법화사 신도회장, 제주도불교청소년연합회장, 혜향문학회장 등을 역임하며 제주불교 발전에 기여해 왔다.  <편집자 주>

 

중문중, 조명철 불자와 원문상 스님 사제지간
원문상 교사, 학생들에 가장 존경받는 스승

 

 

조명철 회장이 스승이었던 원문상 스님에게 선물로 받았던 한글갈(최현배 지음, 1940년) 책을 보물처럼 꺼내들며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다.

해방공간의 지식승이자 교육자로 잘 알려진 만허 원문상(滿虛 文常, 1908~1950) 스님은 교육계와 불교계 원로이신 조명철(84) 前 혜향문학회 회장의 70평생 불심의 뿌리가 되어준 큰 스승이다. 서귀포시 하원이 고향인 원문상 스님은 어머니가 타 지방이다. 그 영향으로 고학을 통해 혜화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를 졸업했고, 제주에서 유일한 한글학회 회원이었다. 이후 1930년 말 경주 기림사에서 출가, 삭발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해방 후 조선불교혁신준비위원회가 서울에서 개최되고, 이것을 각 지방으로 홍보하는 과정에서 원문상 스님의 역할이 컸다. 스님은 1945년 12월 관음사 제주읍내 포교당인 대각사에서 열린‘조선불교혁신 제주불교승려대회’의 부의장을 맡아 불교혁신을 주도한다. 1947년 고향인 하원으로 돌아와 중문중학원에서 역사와 한문, 동양사 등을 가르치며 교육자의 길을 걷다가 1949년 당시 중문중학원 1학년으로 입학한 조명철 회장과 사제지간으로 인연을 맺게 된다.

14살 무렵 청소년 시기에 조 회장의 눈에 비친 원문상 스님은 스님이 아닌 교사였다. 원 스님은 왜소 했지만 박식함에 게다가 막힘없는 언변과 열정의 에너지까지 갖춘 분으로 기억했다. 

“원문상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스승으로 유명했어요. 우리에겐 역사를 가르치셨는데 책을 보지 않고도 우리나라의 역사를 꿰뚤고 계신 분이었죠. 특히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일방통행이 아닌 소통을 하셨지요. 늘 역사가 아닌 인생의 이야기든, 종교이야기든 늘 질문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작은 키에 똘똘했던 조 회장을 스님은 애제자로 아끼셨던 모양이다. 하루는 오전 수업을 끝마친 후 함께 갈 곳이 있다며 법화사로 향했다.

“그날이 부처님오신날이었던 것 같아요. 법화사에 도착하니, 대웅전 중심에 긴 기둥을 세워놓고 운동회할 때 다양한 국기를 걸어놓듯 그렇게 많은 국기가 걸려있고, 주변에는 등들도 많았지요. 당시 법화사에는 서귀포에서 안덕면 사람들까지 신도였으니까 사람들로 야단법석이었어요. 선생님이 요사채에서 나오시더니 가사장삼을 하고 나오시는 거라.‘아! 선생님이 스님이셨구나’라고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문상 스님의 젊은 시절 모습.

존경하던 선생님이 스님이셨기에 조 회장도 자연스럽게 불문에 귀의하게 된다. 일반적인 어머니의 불심 따라 절에 다녔던 불연이 아닌 스승의 불심이 고스란히 제자에게 전해 진 셈이다. 
하지만 제주의 근현대사에 가장 큰 고통을 안겼던 4·3광풍이 몰아칠 무렵이기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적었다. 

“내가 4·3이 초등 6학년 때 발발했어요. 그 영향으로 중학생이 되서는 죽창 들고 보초서고, 마을 성담을 싸러 다닌 시절로 시국이 어수선했기 때문에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안됐어요. 그래서 학생들은 당시 수학을 가르쳤던 이경주 선생님 댁에서 가서 밥을 직접 해 먹으며 공부를 하고 그랬어요.”

중문중학원은 현 중문중학교의 전신으로 원문상 스님과 제주 중문면 출신의 이경주 교사에 의해 설립된다. 처음에는 중학원 인가 학교였으나 제주 4·3 서귀포지역 진압군 사령관이었던 전부일 소령이 배려로 인근 삼나무를 벌목해서 학교를 다시 세웠는데 그 고마움의 뜻을 전하고자 소령의 가운데 ‘부’자와 중문의 ‘문’자를 따서‘부문중학교’로 개칭한다. 1950년 4월 정부인가 정식학교로 인정받는다.

“중학교 3학년 무렵,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했어요. 원문상 스님이 잡혀간 것도 몰랐고 소문으로만 돌았어요. 스님은 당시 승단에서도 개혁적인 생각을 갖고 계셨던 분으로 알고 있었어요. 당시 지식인층은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이 강했습니다. 그 때는 막스-레닌주의에 물들지 않은 지식인이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원문상 스님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예비검속으로 자신이 잡혀 갈 것을 예감했던 모양이다. 제주 유일의 한글학회 회원으로 가장 아끼던 한글갈(최현배 지음, 1940년) 책을 애제자 조 회장에게“한글을 열심히 공부하라”며 선물했다. 한글갈 책에는 원 스님의 낙관이 곳곳에 찍힐 있을 정도로 굉장히 소중히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부문중학교에는 서북청년단 출신 인물이 교감으로 부임했고, 설립자인 원문상 스님과 이경주 선생과의 마찰은 뻔했다. 1950년 8월 원문상 스님과 이경주 선생은 4·3 가담혐의가 덧씌워져 군경에 체포됐다고 한다. 그러나 스님이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1950년 7월 서귀포경찰서‘공무원 구속자 명부’에 의하면 원문상 스님은‘좌익사상 극렬자’로 기록되어 있었고, 이경주 교사의 경우‘망원경을 소지해서 산사람하고 연락했다’는 기록이 되어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에게는 투철한 민족주의자로 지역민들의 계몽운동에 앞장섰던 의로운 분이라고 기억되고 있다.

서북청년단 출신 교감은 눈에 가시 같았던 원문상 스님과 이경주 선생을 죽음으로 내몬 후 횡포가 심각해졌다. 결국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교감의 비리를 고발하는 청원서를 쓰게 된다. 당시 김수영 영어 교사의 부탁을 받은 고등학교 1학년이던 조 회장이 직접 김충희 제주도지사를 면회한다. 그 후 그 교감은 타 학교로 발령을 받았다고 한다. 조 회장은 대학생이 됐을 무렵, 김충희 도지사를 다시 만나는데 그 때는 관음사 신도회장으로 조우했다.

4·3의 화해와 상생의 물결이 일어나면서 5년 전에서야 비로소 중문중학교에 원문상 스님과 이경주 교사의 공덕비가 세워졌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조 회장은“그날 왜 그리도 눈물을 흘렸는지 모르겠어요. 그 시대의 아픔을 회상하는 그 자체가 가슴 아팠던 것 같아요. 이경주 선생의 동생이‘그동안 폭도 새끼라고 업신여겼는데 제자들이 비석을 세워주니 고맙다는 말씀 밖에…’. 그리고 원문상 스님의 따님도 참석했는데 그 얼굴에서 스님이 나를 보며 법화사에 가자던 그 해맑은 모습이 떠올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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