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始原)에게<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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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始原)에게<45>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06.14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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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 또는 들판이면 좋고 그것이 아니라면 도심 복판이어도 괜찮은데 다만 늦은 밤이면 늦은 밤일수록 어울릴 법한 겨울나무가 서 있는 풍경

                                         박형준

 

 

겨울나무는 사다리 같아서

삐걱대는 별들의

목조 사다리 같아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그 끝에 서면

뿌리로만 말하는

메아리의 샘물

 

나뭇가지로

폐허를 가꾸는

달의 춥디추운 운행이나

먼데서 숲을 갈아 강을 내며 온다는

상아(象牙) 같은 바람

안에서부터

화염이 두근두근대며

쩡쩡한 밤하늘에 터지는 별빛조차

견뎌야 하는 일이라면 모두

겨울나무가 하는 일

 

별은 닿지 않아도

뿌리를 내놓고

하늘에 거꾸로 박힌 샘물,

겨울나무에겐 견디라고 있는 것이다

 

<시인수첩>, 2017년 봄호.

 

 

<시인수첩> 봄호에 실린 박형준의 시 ‘강변 또는 들판이면 좋고 그것이 아니라면 도심 복판이어도 괜찮은데 다만 늦은 밤이면 늦은 밤일수록 어울릴 법한 겨울나무가 서 있는 풍경’은 제목만 긴 것이 아니라 여운도 길다. 

지난겨울에 제주도립미술관 부근을 지나다 본 겨울나무 생각이 난다. 아주 작지도 그렇다고 크지도 않은 나무였다. 적당한 크기에 앙상한 나뭇가지. 마치 스무 살 자취 생활에서 처음 맞는 겨울 느낌이었다. 

겨울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지 아직 낯선 나무. 오래된 나무야 안심이지만 들판에 혼자 덩그러니 선 채 겨울을 견뎌야 하는 어린 나무. 나무는 겨울을 나며 자랄 것이다. 점점 높이 자라 별에게 가까이 가는 사다리가 될 것이다. 

지난겨울에 시민들이 거리에 있었다. 겨울나무처럼. 그곳이 우리가 살아야 할 땅이기에 우리는 견뎠다. 이제 여름. 겨울을 견딘 나무는 연둣빛 이파리를 반짝이고 있다.

/현택훈(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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