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교리 공부가 먼저…수행, 포교 완성될 때 불자의 삶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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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교리 공부가 먼저…수행, 포교 완성될 때 불자의 삶 완성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06.14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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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불교의 주춧돌, 당신을 모십니다 <2> - 조명철 前 혜향문학회장 <진원일 스님과 인연편> -

1950년 초반 ‘불교학생연맹’회장 소임
진원일 스님, 대학시절 사제지간 인연

 

조명철 회장이 삶에 큰 영향을 줬던 불교 이야기에 거침이 없었다. 그 소회를 꺼내며 미소를 짓고 있다.

유년 시절에 가장 큰 인생의 항로를 가르쳐 준 원문상 스님을 비극적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묻어야만 했던 조명철(84) 회장. 

스승에 대한 마음의 빚이 남은 것일까.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그의 불심은 확고하게 뿌리내린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제주시 지역 제주농고와 오현고로 진학을 꿈꿨지만 가난한 집안환경 때문에 서귀농고로 입학했어요. 당시 서귀농고가 정방사 인근에 있었는데 무애(無碍)스님이 주석하고 계셨습니다. 스님은 굉장히 지식을 갖춘, 보기 드문 분이셨어요. 짧은 스포츠머리에 승복보다 사복을 입는 등 원문상 스님이 그랬듯이 그 시대가 승속 구분이 모호했던 것 같아요.”

당시 주말이면 불교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과 무애 스님의 불교 강론을 들었던 조 회장은 그렇게 불심을 머금으며 청년으로 성장해 나갔다. 불교의 내면적 깊이와 본질을 깨치면서 불교는 그의 인생에 좌표가 된다. 마왕 파순의 그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았던 부처님처럼 조 회장의 마음속에는 신심이 금강석처럼 자리했다. 

고등학교 시절‘김윤국’이라는 존경하는 국어교사가 있었다. 늘 선생은 수업시간이면 조 회장을 지목해서 글을 읽게 할 정도로 애정을 듬뿍 전한 스승이었다. 하지만 기독교 장로였다. 선생님의 집요한 권유 속에 어쩔 수 없이 서귀포교회에 나갔지만 왠지 마음이 닿질 않았다. 결국, 김 선생도 조 회장의 마음을 헤아렸다. 김 선생의 영향으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자 마음먹는다. 조 회장은 당시 시인 서정주, 소설가 김동리 등 최고 권위를 자랑했던 동국대 국어국문과로 진학하고 싶었다. 역시 가난한 집안 환경이 조 회장의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1954년 제주대학교에 진학하며 원문상 스님에 이은 두 번째 인생의 스승, 진원일 스님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국문학과에 제주어사전을 만든 현평효 교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 바로 진원일 스님이었어요. 중국 두보의 시나, 우리나라 김삿갓 등의 시 등을 엮은 동양문학을 가르쳤어요. 대학 이전에는 오현고에서 생물을 가르쳤다고 해요. 현평효 교수님이 독실한 불교신잡니다. 당시 제주시 용담동 성광사 주지 동산 스님과 진원일 스님이 친분이 있으셨는데 현평효 교수님이 성광사의 신도셨죠. 그런 인연으로 진원일 스님이 제주대학교 교수로 가시게 됐습니다.”

진원일 스님은 관음사 포교당(현 제주은행 본점 맞은편 중앙주차장) 대웅전 바로 오른쪽 요사채에 가족들이 함께 살았다. 자연스럽게 진원일 스님과 사제지간의 인연으로 당시 불교학생회 신행단체인‘불교학생연맹’에 가입하게 된다. 당시 제주대학교에는 국어국문학과, 영어영문학과, 법학과, 축산학과에 불과했지만 많은 학생들이 가입하면서 조 회장이 당시 제주농고, 오현고, 제주여고, 신성여고 학생들과 대학생으로 구성된‘불교학생연맹’ 의 회장을 맡게 된다.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구분이 없었는데 학생들이 100여명이 넘을 정도로 많았어요. 일요법회마다 진원일 스님이 강의를 하셨어요. 그리고 부처님오신날 즈음이면‘부처님 일대기’를 연극으로 만들었는데 대웅전에 구경꾼들이 몰려들었어요. 그때야 볼 만한 게 변변치 않던 시대라 연극을 할 때면 포교당이 만원을 이뤘습니다. 몇몇 어린 아이들이 잘 보이지 않자 상단의 부처님 위에까지 올라 선 겁니다. 당시 포교당의 주인 역할을 했던 원덕성화 보살이 이를 보고는 잔뜩 화가 나서‘너희들이 불자냐’며 호통을 치는데, 한동안 절에 못 오게 했던 기억도 새롭네요. 허허허”

뿐만 아니라 조 회장은 당시로는 생소했던‘찬불가’가사를 수집해서 김국배(당시 제주여고 교사) 선생의 지도로 널리 학생들에게 배포하는데도 힘쓴다. 

그리고 당시 4·3의 영향으로 한라산 입산금지령이 내려지면서 제주불자들은 1955년 제주시 도남동에‘알 관음사(현 보현사)’를 낙성하게 된다. 당시 보현사 주지 스님이 바로 일붕선교종을 창종한 서경보 스님이었다. 당시 동국대 교수로 재직시 쓴‘불교입문’을 통해 불교를 교학으로는 처음 접한다. 그 책을 통해 토론의 장을 만들면서 학생들의 신앙의 틀을 잡는 토대가 된다.

“불교는 교리 공부가 먼저입니다.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바로 알고 수행의 토대가 세워져야 합니다. 스님들의 이야기만 듣는 것보다 교리를 확고히 한 뒤 수행하고, 일상생활에서 계율을 지키며 포교를 해 나갈 때 불자의 삶이 완성된다고 봅니다.”

불교학생연맹 활동을 통해 심오한 부처님 법이 인생의 길잡이로 확고해진 조 회장은 출가를 결심하고 진원일 스님에게 그 인연을 묻는다. 스님은‘생각을 잘 해봐야 한다. 너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문제지, 강요할 수 없다’는 말씀에 결론을 맺진 못한다. 조 회장은 금담스님(故 보림사 주지), 상허 스님(덕흥사 주지) 등 많은 출가인연을 맺어줬고, 어머니처럼 의지했던 강향규 보살에게 그 묻자‘집안의 대를 이을 독자가 스님이 되겠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펄쩍 뛰면서 반대한다. 이에 진원일 스님도 ‘자네는 현생에는 스님 될 인연이 없네. 강향규 보살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 부모님도 허락하지 않을 걸세’라는 말씀에 출가의 연을 접는다.

그 무렵, 불교정화운동이 일어나면서 비구·대처 간 분쟁으로 불교계는 큰 혼란과 아픈 상처가 남는데 제주불교계도 그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다.

“소위 정식으로 출가하지 않은 사람들도 목탁치는 연습하고 염불 좀 배워서 사찰을 점령하러 제주까지 내려 온 거야. 진원일 스님의 다급한 연락에 학생들이 대항마로 싸움이 붙었는데 우리가 숫자적으로 우월하게 많으니까, 1차적으로 후퇴를 하더군. 그들이 다시 온다는 소식에 학생들이 몽둥이를 들고 보초를 서고 그랬어요. 역부족을 느낀 이들이 신도들을 동원했죠. 신도회는 진원일 스님을 내쫓는 입장이었습니다. 신도회와 학생들 간에는 고성이 오가며 싸움이 났고, 결국 경찰까지 동원되서 진원일 스님이 끌려 나오면서 일단락 됐어요.”

‘인재’라는 불명 받고, 2대 태고종 신도회장 역임
불서 통해 불교 참 진리 일깨워 출가까지 ‘꿈꿔’

관음사 포교당에서 쫓겨난 스님은 강향규 보살의 도움으로 오현단 인근에 모시다가 당시 강향규 보살, 임덕희 보살, 서상흠 거사(초대 태고종 제주교구 신도회장, 신흥기업 대표이사) 등이 힘을 모아 사라봉 보림사를 창건하며 진원일 스님을 모시게 된다. 조계종이 1962년 창종된데 이어 1970년 태고종도 창종되면서 제주시 시민회관에서 보살계 법회를 봉행하며 외연 확장에 나선다. 이날 조 회장은 당시 계사였던 묵담 대종사로부터‘인재(忍齋)’라는 불명을 받고 제2대 태고종 제주교구 신도회장까지 역임하는 등 태고종 제주교구 발전에 헌신하게 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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