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토함산 석불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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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토함산 석불사 (1)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06.21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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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사찰순례(42)

우리나라는 물론 외국의 미술사학자들이 우리나라 유물 중 최고로 꼽는 것이 무엇일까? 여러 학자들을 한 곳에 모아 수많은 유물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국내외 여러 학자들이 쓴 글을 바탕으로 보면 그들이 본 가장 감동적인 유물로 경주 토함산에 있는 석굴암과 불국사를 가장 많이 꼽았다. 그 중에서도 석굴암(국보 24호, 세계문화유산)에 대해 절절한 글을 더 많이 남기고 있다. 어려서부터 계속 들어온 이름이고 실제로 가서 보아도 굴처럼 생긴 곳에 불상을 모시고 있어서 대부분 사람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석굴암을 말 그대로 불상을 모신 굴일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석굴암은 굴이 아니다. 돌로 굴처럼 만들어 불상을 봉안한 곳이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석굴암이라는 이름보다 석불사라는 이름이 맞다. 

그렇다면 왜 굴을 파지 않고 더 복잡하고 어려운 인공 석굴을 만들었을까? 경상북도 군위에 가면 제2 석굴암이라고 쓰인 이정표를 볼 수 있다. 넓은 수직의 절벽에 생긴 작은 굴을 높이와 폭을 4.5m 크기로 더 파내어 삼존석불을 모신 이름 그대로 석굴로 된 암자, 석굴암이다. 경주에 있는 석굴암이 워낙 유명했기 때문에 그 이름을 빌어 제2 석굴암이라 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 군위 삼존석불을 석굴암 또는 제1 석굴암이라 해야 한다. 왜냐하면 군위 석굴암이 석굴암보다 일찍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군위군청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국민들에게 더 홍보하여 군위 석굴암으로 이정표를 바꿔도 될 때라 생각한다. 

이러한 석굴사원의 전통은 고대 인도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인도나 중국에는 퇴적암의 하나인 사암이나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암벽이 많다. 우리나라에 흔한 화강암과 달리 돌이 물러 굴을 파는데 크게 어렵지 않다. 기후도 우기만 빼고 일년 내내 건조하고 기온도 높아 석굴안이 시원하고 좋다. 우리나라는 겨울에 온돌이 아니면 추워서 견디기 힘든 기후에다 화강암이 워낙 단단하여 굴을 판다는 것은 거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자연 조건에 맞추어 탄생한 것이 석굴처럼 만든 석불사다. 즉 자연 환경이 만든 한계를 석공들이 돌다루는 기술로 슬기롭게 극복한 것이다. 처음 군위 석굴암에 답사 갔을 때 중국과 인도의 석굴 사원들과 비교하면서 인도와 중국이었다면 저 넓은 수직 절벽을 그대로 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신라가 국력이 강하고 인구가 많았으면 어땠을까하는 상상을 하며 아쉬워 했었다. 이후 운 좋게 석굴암 조사팀과 함께 석굴암을 답사할 기회가 있었다. 그후부터 현재 남아있는 우리나라 불교 유물이 인도나 중국처럼 거대하고 다양하지 않지만 석굴암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그들에 못지 않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그만큼 석굴암은 일당백의 최고의 문화유산이다. 

원래 인도의 석굴사원은 예불당인 차이티야와 예불당과 스님들의 머무는 공간이 함께 있는 비하라로 나뉜다. 차이티야의 경우 탑이나 불상을 모신 주실(후실)과 예배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실로 구성된다. 지금의 석굴암에 가면 유리창으로 막아 보호하는 곳 앞쪽이 전실, 안에 불상이 모셔진 곳이 주실이다. 그렇다. 석굴암은 인도의 초기 석굴사원과 같은 구조로 만들어진 구조물이다. 인도와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알려진 초기 석굴사원을 석굴을 파기 어려운 우리나라 환경에 맞게 돌을 다듬어 만들어낸 석굴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탑이나 불상을 만드는 돌은 입자가 굵은 화강암이다. 이탈리아의 미켈라젤로가 만든 피에타상 등 많은 조각품들과 그리스의 미로섬에서 발견된 비너스 등은 재료가 대리석이다. 인도에서는 편마암이나 사암 계통의 돌로 불상을 만들고, 이웃한 중국에도 대리석이나 석회암, 사암 계통의 돌로 만든 불상이 많다. 이처럼 다른 나라에서는 우리나라와 다른 재료로 건물과 조각품을 만드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외국의 조각가들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좀처럼 재료로 사용하지 않는 거친 화강암으로 탑과 불상을 만들었다. 아마도 단단하면서도 주변에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소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화강암은 입자가 굵어 둥근 알갱이가 쉽게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그런 재료를 사용하여 다양한 표정을 지닌 불상을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굴암을 조각한 이름이 전하지 않는 석공은 그런 재료에 제각기 다양한 표정들로 차가운 돌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아마도 그가 이탈리아에 태어났으면 미켈란젤로보다 더 뛰어난 조각가가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누구나 최고의 유물로 생각하는 석굴암도 1200년 넘게 내려오는 동안 수난이 많았다. 근대에 와서 석굴암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07년 석굴암 근처를 지나가던 우체부가 석굴암 석실 일부가 무너졌다고 보고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 힘이 없던 조선을 집어삼키기 위해 조선의 지리, 역사, 문화에 관심을 갖고 있던 일제는 석굴암을 마치 처음 발굴한 것처럼 선전했다. 그러자 많은 일본인들이 석굴암에 방문하면서 탑과 불상을 반출하는 등 파손이 적지 않게 일어났다. 조선이 망한 후 총독부에서 무너진 석굴암 복원 대책을 세우는 과정에 유력가 중 한 사람은 아예 석굴암 전체를 해체하여 일본 도쿄에 가져가서 세울 계획을 세웠다. 다행히 현지 주민들의 강한 반발과 일부 소양 있는 지식인들의 저지로 계획은 무산되었다. 1913년부터 1923년까지 진행된 복원은 완전히 해체한 후 다시 세웠는데 그 과정에 원래의 모습에서 변형이 일어났다. 자연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석굴암을 기차 터널 파는 토목기사들이 당시 최고의 건축자재라는 시멘트로 바르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게다가 해체하는 과정에 석굴암에 있는 석재들이 원래 어떻게 되었는지 정확히 기록하지도 않아 1962년 우리 기술로 다시 복원하는 과정에도 학자들 간 이견이 생기게 되었다. 최근 다시 제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의견이 학계에서 일고 있는데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일제에 의한 복원과 1962년의 복원처럼 정확한 대안이 없이 해체, 복원하는 것은 더 파괴하는 것과 다름 없으므로 그럴 바에는 복원하지 말고 더 나은 기술과 연구 성과를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다.

시인 청마 유치환(1908∼1967)의 <석굴암 대불>을 통해 인간들의 만용에 이리 채이고 저리 채였어도 묵묵히 제자리에 앉아 보고 있는 석굴암 불상의 마음을 느껴보자.   
          
목놓아 터뜨리고 싶은 통곡(痛哭)을 견디고 
내 여기 한 개(個) 돌로 눈감고 섰노니. 
천(千) 년(年)을 차가운 살결 아래 더욱 
아련한 핏줄, 흐르는 숨결을 보라. 

목숨이란! 목숨이란― 
억만(億萬) 년(年)을 원(願) 두어도 
다시는 못 갖는 것이매 
이대로는 못 버릴 것이매, 

먼 솔바람 
부풀으는 동해(東海) 연(蓮)잎 
소요(騷擾)로운 까막까치의 우짖음과 
뜻 없이 지내는 흰 달도 이마에 느끼노니, 

뉘라 알랴! 
하마도 터지려는 통곡(痛哭)을 못내 견디고 
내 여기 한 개(個) 돌로 
적적(寂寂)히 눈감고 가부좌(跏趺坐)하였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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