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법한 진상조사 이뤄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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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법한 진상조사 이뤄져야”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06.21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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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세미나

세미나 토론자
수암 스님 (금붕사 주지) · 김종민 (前 제주4·3위원회 전문위원) 
오승국 (제주4·3평화재단 기념사업팀장) · 이병철 (제주불교신문 편집부장)

 

 

수암 스님

숭고한 희생정신 알려나가야

순교하신 스님들에 대한 예우로서 그동안 위령제, 혹은 추모법회를 봉행하지 못하고 유족들과 연로하신 신도님들 몇 분만이 동참하는 기일제사로 모셔왔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마저도 끊긴 형편이다. 

2010년 4월에 순교하신 스님의 원혼을 달래고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과거의 아픔을 극복하고 평화로운 미래를 열려는 마음으로 대주제인“금붕사의 봄날”과 부제인“해원을 넘어 평화의 언덕으로”이라는 공연을 기획하여 제1회 공연은 문화회관에서, 제2회 공연은 4·3평화공원에서, 그리고 제3회 공연은 구좌읍 동녘도서관에서 3회에 걸쳐 금붕사 합창단인 나유타 합창단을 중심으로 공연이 이루어졌다. 

공연의 취지와 내용은 4·3 당시 금붕사에 한 젊은이가 숨어들어 왔고 이를 보살펴준 주지스님이 무참히 토벌대에게 살해당하는 과거의 사건을 재현하여 아픔을 잊고 지금의 큰 사찰을 이룩한 주지스님과 신도들의 아픔을 달래주는 영산재를 지내는 장면을 중심으로 연극과 합창으로 진행된다.

공연의 시작은 연극적인 요소를 활용해 이야기를 전개하고, 영산재를 지내는 과정을 축소하여 독경과 승무 합창으로 마무리되어진다. 

당시 공연에 참석한 4·3 평화재단 이사장 장 정원은“이번 공연은 금붕사의 비극을 뛰어넘어 제주 4·3사건으로 인한 억울한 원혼들이 해원과 극락왕생을 이루게 하는 법석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제주 4·3사건에 대한 여법한 진상조사와 함께 제주불교교단의 피해 및 순교하신 스님들의 역사적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았으며, 그리고 그 분들이 남기신 숭고한 희생정신은 불교계와 전 도민에게도 알려 나아가야 할 것이다.

순교하신 스님들은 해방공간에 육지에서 오셨거나 제주출신들로 불교의 불모지였던 제주도에 오늘날에 제주불교의 견인차 역할을 하신 분들이다.

당시 스님들은 주민으로부터 신망과 존경을 받은 분들이다. 관혼상제, 사회·경제분야, 가정문제, 농촌계몽 등의 다양한 지도자 역할을 하시면서 주민들에게 정법과 불교신앙을 펼쳐왔다. 이른바 이 분들은 제주도민들과 삶을 함께 하신 대보살들이시고, 그리고 호국불교를 위해 실천하신 분들이다.

이에 본 논평자는 제주불교교단의 사찰 및 스님들의 피해 등에 대한 조속한 조사가 진행되고, 그리고 명예회복 등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또한 어렵게 마련한 삼보정재를 태워버린 사찰들에 대한 손실까지도 보상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4·3의 격전지며 제주대표 사찰인 관음사에 4·3 순교비를 세우거나 부도탑을 조성하여 불자들에게 참배의 장소로 성역화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해마다 초종파적 합동 위령제를 봉행하고, 이곳을 역사의 교육현장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그동안 제주 4·3사건에 있어서 제주불교교단의 다양한 피해와 스님들의 순교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연구 및 조사가 없었다. 이에 한 금순 박사의 발표문이 제주 4·3사건에 대한 후속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길 기원한다.

 

김종민 토론자

“제주의 스님들”평전 나왔으면

2002년에 위와 같은 성과를 보면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설령 의지가 있더라도 수행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는 원로스님들에 대한 증언 채록, 그리고 신문자료와 불교잡지 등 1차 사료의 집성 작업이 이뤄지는 것을 보면서, 향후 제주불교사 연구에 분명히 대단한 성과가 탄생할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1차 사료와 이를 뒷받침하고 보완해 줄 생생한 증언은 역사 연구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만일 이와 같은 1차 사료가 없다면‘역사’가 아니라‘풍문’이 되거나 어렴풋한 기억만을 토대로 한 부정확한‘회고담’만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작업을 주도한 제주불교사연구회(오성스님, 한금순, 한금실, 김봉현)의 활동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료집이 출간될 무렵, 아마도 2002년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나는 제주불교사연구회가 주최한 한 세미나에 토론자로 초대되었다. 그때 나는 제주불교사연구회가 많은 조사·연구를 한 결과에 대해 놀랐음을 밝히면서“오늘은 우리가 오래 전 제주불교의 역사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데, 훗날엔 오늘 열린 세미나 자체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라며 감상을 말했던 아련한 기억이 난다.

1988년부터 제주4·3사건에 대해 공부하고 있지만,‘불교계와 4·3사건’에 관해서는  한금순 선생님께서 쓰신 글에 더 이상 빼거나 보탤 것이 없다. 내가 이 주제에 관해 한 선생님만큼 연구할 능력이 없기에 앞으로 글을 쓸 때 인용할 예정이다. 

따라서 한금순 선생님의 발제에 대해 토를 달 말이 없다. 또한 한 선생님이‘제언’한 것에도 깊이 동감한다. 

한금순 선생님의‘제언’처럼 해당 사찰에 추념비, 안내표지석을 세웠으면 한다. 또한 순례 코스를 만들어 함께 걸으며 그 분들의 정신을 되새기는 프로그램이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스님들의 행적을 모아 가칭 『제주의 스님들』이라는 평전을 만들면 더욱 좋겠다.

우리는 오늘 지난 역사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데, 지금 오늘 이 시간도 부끄럽지 않은 제주불교의 역사를 만들어 가야하고, 이를 기록해야만 한다.

 

오승국 토론자

관음사유적지 역사교육장으로

제주불교는 4·3당시 회복 불능의 피해를 입었다.

사찰 37개소가 전소되는 등 참화를 겪었고, 스님 16명이 희생되었다. 

당시 제주민중들은 식민지 사회의 두려움과 절망을 불교에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스님들 또한 민중에 대한 연민의식과 제주 공동체를 지키려는 진보적 성향이 강했다. 이러한 상황은 스님들의 희생을 가속화시켰다. 사찰 또한 산중에 있다보니 토벌대에 의해 소각되어 폐허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4·3당시 격렬한 격전지였던 관음사 경내 5만평의 밀림지대에는 중대와 소대급 숙영지 27곳이 무더기로 산재해 있다.

숙영지는 가로 25m 세로 25m급의 중대급 숙영지와 그보다 규모가 작은 소대급 숙영지, 3-4명이 잠복할수 있는 초소를 비롯하여 7-800m에 이르는 제1방어선, 제2방어선 등이 돌담으로 겹겹이 구축돼 있다. 

특히 관음사 뒷산인 아미봉 정상(해발 650m)에까지 숙영지와 초소가 만들어져 당시 토벌대가 무장대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 얼마나 철저히 대비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관음사지역은 4·3직후부터 무장대의 길목으로 이용되면서 48년 5월 토벌대가 대규모토벌작전을 전개한 이후 48년말과 49년초에 이곳에서 토벌대와 무장대사이에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미군정 보고서인 G-2보고서에는 48년 12월 15일, 경비대가 관음사부근에서 무장대 8명을 사살한 것을 비롯 49년 3월 또다시 이 지역에서 5명을 사살하고 20명을 생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어 49년 3월 2대대 병역 800명이 주둔하게 되는데 지역주민들을 동원하여 참호를 파고 돌담을 쌓아 방어벽을 구축한 것으로 당시의 관계자들은 증언하고 있다.

관음사 4·3유적지는 향후 정밀조사를 벌여 이 지역을 4·3역사의 현장으로서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역사교훈의 장, 참혹하게 희생된 원혼을 천도하는 위령의 장, 유족의 맺힌 한을 해원하는 상처 치유의 장으로 복원 보존해 나갈 필요가 있다.

제주 불교의 4·3 유적지는 70년 전, 제주도민들이 몸소 겪은 피어린 역사의 흔적이며 현장에 있는 역사박물관이란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이 자리에서 두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는 보존해야 할 불교 4·3유적지를 선정하고, 이를 가능한 선에서 체계적으로 정비 관리해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는 불교 4·3유적지 기행코스를 만들어 유적지를 통한 테마기행을 활성화 하는 것이다.

이는 제주에서 가장 큰 다크투어리즘의 가능성을 열어 줄 것이고, 일제 전적지, 문화유적, 문화, 자연유산과의 융합을 통한 평화투어리즘 시대를 여는 핵심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병철 토론자

희생당한 스님들 추모비 세워야

4월이면 제주도내 전역에 억울한 죽임을 당한 원혼을 추모하는 4·3행사가 펼쳐지는 가운데 4·3당시 사찰을 사수하며 불교를 지켜내려 목숨까지 내 놓았던 16명의 스님을 추모하는 행사는 전무하다.  스님들은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친일을 반성하며 왜색화 된 불교풍토를 정화하고 의식을 개혁하고자하는 역량을 보여줬다. 하지만 4·3에 휘말리면서 종교적 활동이 중단되는 사태까지 이르게 되었다. 불자들의 기억 속에 잊히고 있는 4.3당시 입적한 스님들의 추모비를 세워, 숭고한 넋을 기리며 불자들의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

불교는 이처럼 4·3의 피해에 비해 유적지 관리에도 철저하게 배제되어 왔다. 주제발표 내용에도 밝혀져 있듯이 제주불교계는 4.3으로 인적, 물적 피해가 막대했지만 그동안 종교라는 잣대를 들이대면서 세미나나, 발굴 사업 등에 그동안 홀대받으며 역차별을 받아온 게 사실이다.

관음사는 도내에 산재한 유적 가운데 역사적으로 중요성이 인정된 곳이다. 1949년 2월 제주지구전투사령부 제2연대 소속 군인들의 방화로 관음사 건물 전체와 불상, 탱화, 불구 등 사찰재산 전부 소실되고, 같은 해 3월경 대대 규모의 병력이 관음사 폐허에 전진 배치되면서 관음사는 제주4·3의 역사적 현장에 선다.

제주불교의 뿌리이자 제주불자들의‘마음의 고향’관음사의 전소는 제주불교 전체가 상심 하고 비탄에 빠지는 일이었다.

이런 역사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역사의 현장이 관음사다.  2005년 수립된 제주4·3유적지 종합정비 기본계획에 의해 우선 정비대상지인 북촌 너븐숭이, 관음사 아미봉 정상에 4.3유적인‘경계 참호’섯알오름 학살터, 낙성동 4·3성 등을 중심으로 복원되며 교육장으로 역할을 하고 있지만 관음사의 유적에 대해서는 무관심의 도를 넘었다. 안내표지판 설치 후 수년 간 사후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더 이상 원형을 잃어버리기 전에 복원·정비 사업을 서둘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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