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사건과 제주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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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사건과 제주불교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06.21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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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세미나

지난 17일 열린 제주불교 4·3의 진실 규명을 위한 세미나에서 4·3사건으로 인해 제주불교가 엄청난 희생을 치른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37개 사찰이 불태워졌고 16명의 스님들이 희생을 당함으로써 제2의 제주불교 무불시대를 초래했다는 지적이다. 
이날 세미나에서 나온 함금순 박사의 주제발표문과 수암 스님을 비롯한 토론자들의 토론문 내용의 일부를 실었다. <편집자 주>

 

한금순 문학박사

제주불교는 제주4·3사건으로 인해 불교 활동 전반에 걸쳐 손실로 종교 활동 자체가 중단되는 시련을 겪어야했다. 제주4·3사건은 제주4.3 특별법에 따라 2003년 10월 15일 제주4·3사건 진상 정부보고서가 확정되었고 10월 31일 국가차원의 공식적인 사과가 있었다. 이에 따르면 제주4·3사건은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3만여 명의 제주 주민이 희생되었으며 이들의 80%가 토벌대에 의해 학살되었고 이는 이승만대통령의 강경진압에 의한 것으로 제주4·3사건은 국가의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이라 규정되었다.
 
1. 제주불교의 제주4.3사건 사찰 피해 현황
토벌대는‘1948년 10월 20일 이후 해안선에서 5Km 이상의 지점과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하고 위반하는 자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총살한다.’고 포고하고 주민 소개령을 내리고 마을을 방화하고 주민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제주도의 지형상 해안선 5Km 이상은 해변 마을을 제외한 전체에 해당하며 한라산은 1954년 9월에서야 출입통제가 해제된다. 

사찰은 산간지역이나 인가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경우에 피해가 많았다. 토벌대에 의한 소개(疏開)는 남겨진 시설물이 무장대에게 이용될 여지마저도 없애기 위해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소각 등의 방법으로 폐허화시키는 행위를 동반하였다. 그래서 사찰의 피해는 거의 폐허화 시키거나 소각되어지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제주4·3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제주불교 사찰은 37개소 정도 조사되어 있다. 사찰 내에 있던 법당과 요사채, 객사 등의 사찰 내 건물들의 경우를 주로 파악할 수 있다. 건물 이외에도 불상 등 종교시설의 필수요소라 할 수 있는 분야의 여러 종류의 피해가 있으나 집계하기가 쉽지 않다.

소개령을 받고 피난 할 경우는 불상 등을 피난시키는 경우도 있었으나 끌어안거나 등에 업어서 옮겨 다녀야 했던 상황이어서 불상과 탱화, 집기 등의 훼손도 심각하였다. 피란 중인 시기 남의 집 빈방을 빌려 불상을 임시로 봉안해야 했고 이마저도 여러 번 옮겨 다녀야 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관리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점점 훼손 정도가 심해져 대부분 몇 년 안에 폐불 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현재 4·3사건 이전의 불상과 탱화 등은 조사대상 전체 사찰을 통틀어 소수가 남아있는 정도이다. 사찰 건물 피해 정도에 수반되는 불상, 종 또는 사찰 내 집기의 피해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찰 건물의 피해는 함덕리 본원사 1개소를 제외하고는 모두 군과 경찰,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토벌대에 의해 자행되었다. 본원사는 무장대가 법당 일부를 불태웠다. 본원사 주지스님의 아들 김병택은 외도지서 주임, 제주비상경비사령부 특별수사대 제1반장을 지낸 경찰이었다. 
선광사는 지은 지 3년 밖에 안 된 좋은 목재라 해서 법당 철거 후 남원중학교 건설에 사용되었다. 법화사는 법당 등이 전소된 후 1950년 법당과 요사채를 어렵게 마련하였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2년 2월부터 1953년 9월까지 모슬포 육군훈련소 제3숙영지로 이용되며 다시 사찰로서 활동이 불가능하였다. 고관사는 마을 안에 인가와 인접해 있어서 소개될 상황도 아니었으나 1948년 11월 조천면사무소가 불에 타 업무를 볼 수 없게 되자 면사무소로 적합하다 하여 경찰이 총을 등에 들이대며 요구하는 바람에 40만원에 강제매각 당하였다. 


 

2. 제주4·3사건 제주불교 승려 피해 상황
제주불교의 제주4·3사건으로 인한 승려의 피해는 사찰 건물의 피해 이상으로 치명적이었다. 해방을 맞아 의욕에 차있던 제주불교계는 그동안 불교 활동을 이끌던 주요 승려들의 희생으로 불교활동이 침체 되어버렸다.

조사된 인명 피해는 모두 14개 사찰의 16명의 스님이다. 사찰 소속 인명들의 피해도 물론 있었다. 피해 형태로 구분해 보면 총살 10명, 수장 2명, 고문 후유증 사망 1명, 일본으로 도피 1명, 행방불명 2명이다. 가해자는 모두 토벌대이다. 피해 시기는 사찰 피해와 유사한 시기인 1948년 말부터 1949년 초에 걸쳐 많이 발생하지만, 한국전쟁 발발 이후인 1950년 여름까지도 이어진다. 1950년 7월에서 9월까지는 예비검속 된 인사들의 피해시기이다. 4·3사건 발발의 원인인 1947년 3·1사건이나 2·7사건 등과 연관이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요시찰 인물, 또는 불순분자라는 명목으로 많은 사람들이 무허가 집회, 폭동 음모 등의 구실로 어떤 계기가 있을 때마다 토벌대에게 예비검속 되었다. 예비검속 된 사람들은 총살이나 수장 등으로 희생되었다.

 

3. 제언
제주불교는 제주의 역사와 함께 했다. 제주4·3사건 시기의 제주 사회 활동에도 제주불교는 적극 동참하였을 뿐 아니라, 제주도민들과 마찬가지의 희생으로 힘든 시기를 겪었다. 

지금의 제주불교는 이들 앞선 제주불교 인물들의 노력과 희생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현 시대의 추이에 맞는 기억의 시간과 공간을 마련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현재 다크투어리즘으로 활용되고 있는 사삼과 마을공동체의 기억과 경제활동을 연계하고 있는 사례를 추천하고 싶다. 불교계도 제주4·3을 기억하는 활동을 주도적으로 펼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관음사는 제주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일 뿐 아니라 제주도를 대표하는 사찰로서도 의미가 크다.

제주의 역사 속에서도 관음사는 제주4·3의 무장대와 토벌대의 격전지로서 이세진 스님 등이 직접 무장대 활동을 했던 곳이며, 토벌대가 관음사를 불태우기도 했던 제주4·3사건의 격전지이다. 제주불교가 제주사회의 현재와 역사 속으로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를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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