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始原)에게<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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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始原)에게<46>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06.28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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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라사(白馬羅紗)

                         이설야

 

백마처럼 하얀 양복 입고 오랜만에 아버지가 나타났다. 사나워진 말굽이 방 안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자 백마라사에서 사온 검정 재봉실이 거미줄처럼 계속 풀려나왔다. 엄마가 손에다 칭칭 감곤 하던,

발정 난 도둑고양이, 아기 울음소리가 귓속을 파고들던 밤. 잠결에 아버지에게서 빠져나온 엄마의 거뭇한 아랫도리를 보았다. 피 묻은 내 얼굴이 간신히 통과한 곳, 세상의 모든 울음이 처음 터지던 곳간.

가래 끓던 바람이 문지방을 밟고 오면 도둑고양이와 생쥐와 지렁이들도 함께 울어주던, 백마라사 상표를 매단 하얀 양복이 무서웠던 집. 끊어진 검정 실을 간신히 이어가던 화평동 집. 

-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 (창비, 2016.)

 

 

과수원집에서 태어난 나는 어렸을 때 처음 본 자동차 불빛을 잊지 못한다. 택시가 마당을 향해 헤드라이트를 켰는데 그 빛이 너무 눈부셨다. 택시에서 술 취한 아버지가 내렸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밥상을 엎을 것 같은 모션을 취했다. 어머니는 사료 공장에서 일했는데, 간호사가 꿈이었다고 내게 말했다. 유리창이 깨져 내 오른쪽 손목을 열두 바늘 꿰맸을 때 엄마는 나이팅게일처럼 나를 극진하게 간호해줬다. 이 시의 화자는 유년을 그리워할까.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유년 시절을 기억하는 기형도 시인도 유년을 그리워했을까. 상처와 슬픔으로 얼룩진 유년이라고 해도 잊을 수 없는 시절. ‘백마라사’는 양복집 이름이다. ‘라사(羅紗)’는 포르투갈의 모직물 라샤(raxa)에서 온 말이다. 주로 양복감으로 쓰이는 모직물을 일컫는 말인데 한자로 쓰니 묘한 느낌이 난다.

/현택훈(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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