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힘들었던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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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힘들었던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07.05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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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제주불교 중흥조 봉려관 스님 탄신 152주년 기념 - 제3회 신행수기 공모 당선작

제주불교 중흥조 봉려관 스님 탄신 152주년 기념 제3회 신행수기 공모에서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을 통해 인생의 아픔을 희망으로 전환해 가는 감동적인 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번 호에는 가작 홍영표 불자의 ‘길고 힘들었던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다’을 싣는다.  <편집자 주>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요즘 이른 아침에도 날씨가 후덥지근한 걸 보면 여름 문턱이 가까워진 느낌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 운동으로 집에서 멀지 않은 민오름을 오르면서 생각해 본다. 오늘 하루도 모든 사람들이 보람 있고, 좋은 하루가 되었으면 하고 말이다. 

하루를 시작하는 마음가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내 삶에서 이렇게 편안하고 여유로운 아침을 시작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린다는 것이 정말 행복할 따름이다. 
40여 분을 걸어 올라가니 벌써 민오름 정상이다. 정자에 앉아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오늘도 힘찬 하루를 시작하리란 마음을 다짐해본다. 

지난 시절 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니 정말 너무 많이 힘들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삶을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원하지 않은 여러 가지 굴곡을 거치게 되고 너무 힘이 들었을 때는 삶을 포기하거나 나락으로 떨어져 삶의 낙오자가 되는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보았다. 나 자신도 어느 한 순간 너무나 힘이 들어 내 삶을 원망하면서 술로 내 마음을 달래보려고도 했었고, 심지어는 삶을 포기하려는 마음도 낸 적이 있었다. 교사라는 내 일과 남은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내 자신을 다스리려고 해도 원망하는 업보만 쌓았을 뿐 심신이 너무 쇠약해지고 그런 때문인지 2001년 여름 한 달간은 한 숨도 자지 못한 채로 불면증까지 시달리게 되었다. 

근 한 달을 한 숨 자지 못하고 교단에 선 내 모습은 초점을 잃었고 그저 가르쳐 온 내용을 감정이 없이 반복하고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내 자신이 부끄럽기 그지없다. 

마흔다섯 되던 여름 날 학교에서 제수씨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병원이었는데 동생이 위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준비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직장 생활이 싫어서 하우스 농사를 하고 있던 건장한 동생이 위암 말기라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아닌가. 이제 막 초등학교 6학년과 3학년, 1학년의 삼남매 아버지인 동생의 나이는 마흔둘이었다. 학교 수업을 정리하고 병원에 가보니 동생과 제수씨는 망연자실한 상태 그대로였다. 

서울 삼성의료원에서 급히 위 절제 수술을 받고 근 한 달을 치료받고 있던 중 8월 초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주시 J고등학교 1학교에 다니던 내 아들이 갑자기 쓰러졌다고 연락이 왔다.

시험을 보다가 발작을 일으키더니 의식이 없다가 겨우 돌아와 병원으로 후송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동생 때문에 한 동안 집중하다가 아들 문제로 다시 고민이 깊게 되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의 병명은 생각하기도 싫은 공황장애였다. 갑작스런 폐쇄감으로 호흡과 심박동이 빨라지고 혼미하면서 쓰러져 의식을 잃는다는 게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신경정신과 약을 복용하면서 치료를 받으면 서서히 호전될 수 있다는 말에 여름방학동안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도록 했고 아들도 이것을 받아들여 치료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잠잠했던 동생의 암이 재발되고 한 달이라는 생명줄을 붙잡고 있을 때, 아들의 병은 점점 깊어만 가고 있었다. 치대에 들어가 치과의사가 되겠다던 아들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친구들 앞에서 쓰러졌다는 부끄러움과 자신의 얻은 병에 대한 원망이 깊어가던 아들은 점점 나락으로 떨어져 학교를 휴학까지 하게 됐다. 게다가 쉬는 동안엔 가끔씩 폭력적으로 변해 집안 기물을 훼손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동안 아무 탈 없이 자라왔고 성격도 좋았던 아이였는데 자신의 병에 대한 원망과 삶의 목표를 잃어버려 점점 폐쇄적인 아이로 변해가는 것을 고통스럽게 지켜보고만 있었다. 집사람은 혼 나간 사람처럼 백방으로 뛰면서 아들 하나 살려보려고 눈물겹게 뛰어다니는 모습에 뭐 하나 도와주지 못했던 내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이때부터 나 역시 정신 나간 사람처럼 삶이 갈팡질팡 갈지자로 가는 듯했다. 

결국 동생은 눈을 감았고, 어린 조카 셋은 나에게 또 다른 짐이 되었다. 어머님도 늘 병환 중이라 병원에 계시는 일이 다반사인데다 제수씨가 있었지만 어린조카 셋의 의지가 되어야 했고, 그런 가운데 점점 마음의 병이 깊어가는 아들을 보며, 내 자신에게 지어진 짐이 너무나 무거워 그만 내려놓고 싶었다. 

그러나 눈물겹게 절에서 하루 삼천 배를 넘어 100일 동안 1만 배를 하고 있는 집사람을 생각하니 내 인생을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밤잠을 안자고 자식의 삶을 위해 노력하는 집사람을 한 번 씩 말렸으나 집 사람은 열심히 부처님의 가호를 믿고 신앙생활에 매달렸다. 

사실, 집사람은 중학교 나는 고등학교 교사로 열심히 생활했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다보니 동료들 간에 신망도 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런 힘든 삶에 지쳐 모든 것을 접고 자식에게만 매달리고 싶었다. 교직을 그만두려고도 생각했으나 주변의 만류와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힘들어도 교직을 이어나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어딘가에 희망의 싹이 있다고 내 스스로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어느 한 순간부터, 내 사막 같던 마음속에 오아시스가 생겨나고 새파란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집사람의 권유로 절에 가끔 올라가서 스님과 차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생긴 변화이다.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는 불교란 절이 상징이고, 절에 가면 부처님이 계셔서 정성껏 소원을 빌면 들어준다는 상식정도였다. 그런데 내 찌든 마음속에 생긴 오아시스는 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부처님의 품으로 이끌고 있었다.

어느 날, 존경하는 스님의 권유로 금산사에서 이틀을 머물게 되었다. 스님이 권해 주시는 차를 마시면서 ‘지난 일들에 대해 내려놓으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에는 내 자신을 부처님 곁으로 끌어당겨준 잊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새벽 도량석이 끝난 후 범종을 치려고 올라간 한 스님이 내게 큰 종을 가슴으로 끌어안으라고 하신 후 서너 번 종이 울렸을까? 내 가슴 속 깊이 억눌렸던 온갖 번뇌가 튀어나오며 눈물이 되어 흐르기 시작했고 스물여덟번의 종소리가 끝났을 때 내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내 마음 속의 영혼을 흔들어 놓은 일이 또 있을까? 마음속 깊이 숨겨졌던 온갖 번뇌가 세상 속으로 나오게 되었고 눈물로 사라져가는 느낌이었다. 이를 계기로 불교와 깊은 인연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불교경전을 읽게 되었고 서서히 내 마음도 정돈되어 가고 있었다. 게다가 아들의 병도 호전되는 듯하였다. 아들은 워킹 비자를 받고 호주로 가서 친구들과 잘 지내면서 여행사진도 보내오고 일하는 모습의 사진도 보내왔다. 그리고 내 자신은 더욱 철저한 불교신자가 되어갔다. 나는 날마다 108배와 금강경 독송을 했고 그러는 가운데 3~4년이 지나면서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아라동 전원주택에 이사 온 후에는 텃밭과 잔디마당도 가꾸고 강아지와 고양이도 키우면서 모든 것을 잊고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평온함도 잠시, 아들은 호주에 간 지 2년 차로 시드니에서 좀 떨어진 멜버른 대학에 입학을 앞두고 있던 중 갑자기 집이 보고 싶다면서 귀국하게 되었다. 잠시 지친 마음을 달래며 쉬던 아들이 J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근 석 달을 근무했을까. 매우 지친 모습으로 저녁에 돌아온 후 깊은 잠을 자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일이 힘든가 보구나 생각하며 그냥 흘려버렸다. 그러고는 다음날 출근하면서 저녁에 아빠랑 소주 한 잔 하자고 하면서 헤어진 게 마지막이었다. 그날 퇴근 후 아무리 기다려도 아들은 오지 않았고, 책상위에 통장과 간단한 메모를 찾을 수 있었다. 엄마, 아빠 미안해요! 하늘에서 뵐게요. 통장에 180만 원 정도 있으니 부족하지만 엄마가 찾아 쓰세요. 이런 간단한 쪽지가 전부였다. 집사람과 나는 정신이 혼미해졌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동분서주 했으나 찾을 길이 막막했다. 하루가 지나고 아들은 싸늘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지친 모습은 없고, 살며시 웃는 모습으로 다가온 아들의 시신을 부여잡고, 우리 부부는 얼마나 울었을까. 

현실을 직시하고 모든 절차에 따라 사랑하는 아들을 동생을 보낸 후 3년 만에 하늘나라로 떠나보내야 했다. 아들을 보낸 어미 마음은 어떨까? 식음을 전폐하고 신심이 지쳐버린 집사람은 정상적인 삶을 살 수가 없었다. 직장이 있기에 학교는 나가지만 집에 오지 않고 지인 집에 잠시 머무르면서 생활을 했고 내가 만나러 내려가곤 했다. 1년이 지날 무렵 여름, 우울증이 심해지던 집사람은 명예퇴직을 하고 지인의 기도처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내 자신도 마음을 잡으려고 새벽에 가까운 절에 올라가 108배를 하고 금강경 독송을 하고 내려와 출근하는 등 시련을 이겨내고 있었다. 직장에서도 일찍 출근하여 경전을 읽고 난 후 일을 시작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내 업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세월이 10여년 흐른 지금 생각해보면 삭막한 사막 같았던 내 마음을 살려놓고 우리 가족을 행복한 가정으로 다시 만들어 놓은 것이 부처님의 말씀이고, 그 말씀 하나 하나가 사막의 오아시스라고 믿고 있다. 

일체유심조라는 말이 있다. 천당과 지옥은 내 마음이 만든다고 본다. 지금도 불교경전을 읽고, 불교의 진리를 찾아 헤매는 생활불교인 생활을 즐겁게 하고 있다. 내 자신을 이끌어 준 생명수와 같은 말씀을 찾아서이다. 

누군가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고 다닌다고 했다. 정말 맞는 말이다. 내 가슴 한 구석에 언제나 사랑하는 아들이 자리 잡고 나와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사랑하는 집사람과 멀리 떨어져 생활하는 딸에게도 든든한 남편과 아빠로서 다시 태어나 있다. 올해 초에는 교직생활을 접고 자연인이 되었다. 산과 들을 걸을 때마다 초록빛 생명체와 향기로운 꽃내음이 더욱더 삶의 욕구를 진하게 해준다. 

이제는 어깨의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 어렸던 조카들도 모두 성인이 되었다. 아직도 어머님은 병환 중이라 요양원에 계시지만 예전과 달리 내 마음은 가벼운 새털과 같다. 이제 우리 가족들은 정말 평온하게 잘 지내고 있다. 집사람은 1년 전부터 화장품 사업을 하고 있다. 더구나 교사를 했었고 우울증까지 심했던 집사람이 생각지도 못했던 인생역전이다. 이제는 활발하게 살아가는 우리 가족들의 모습을 보면서 모진 시험을 치르게 해준 지난날의 삶에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이게 모두 불교의 진리를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방하착(放下着)! 내 자신을 내려놓고 보면 모두가 평온한 것을 몰랐던 내 자신이 부끄럽다. 내가 잃어버렸던 10년은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준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이 꿈같은 10년이었다. 

마지막으로 자주 읽고 되새기는 글귀로 마무리 하고 싶다. 

욕지전생사(欲知前生事) 금생수자시(今生受者是) 욕지내생사(欲知來生事) 금생작자시(今生作者是) 

전생의 일을 알고자 하느냐? 지금 받고 있는  일이 그것이다. 다음생의 일을 알고자 하느냐? 지금 짓고있는 일이 그것이다.

2017년 5월24일 선강(禪剛)서실에서 

/글 : 선강 홍영표 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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