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祈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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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祈禱)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07.12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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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제주불교 중흥조 봉려관 스님 탄신 152주년 기념 - 제3회 신행수기 공모 우수작

제주불교 중흥조 봉려관 스님 탄신 152주년 기념 제3회 신행수기 공모에서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을 통해 인생의 아픔을 희망으로 전환해 가는 감동적인 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번 호에는 우수작 고미선 불자의 ‘기도’를 싣는다. <편집자 주>

 

분홍색 연꽃 양초가 부처님 연화대 모양을 하고 수줍은 듯 몸을 불태우고 있다. 주변에 불을 밝히다가 제 몸을 다 태운 후 검은색 심지가 동그라미 모양으로 오므라든다. 불꽃이 사그라지는 것도 심히 묘하게 보인다. 부처님은 내 원을 들어주시려나.

재적사찰의 스님께 기도해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보왕삼매론에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마라, 병고로서 양약을 삼으라 하셨다. 병뿐 만이 아니고 늙음도 죽음도 찾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중생의 기도인 듯하다.

A 병원 불교 법당이다. 다음날 암 수술을 앞두고 밤 열한 시가 넘어가는 시간인데 초조하다.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삼 층 법당으로 내려갔다. 이십사 시간 열린 법당이었다. 정기검진에서는 한 쪽 가슴에만 나타났는데 두 쪽 가슴을 수술해야 하기에 더욱더 겁이 난다. 대체 암이 무엇이기에 무서움이 따르는 것일까. 

법당 안에는 불안해하는 환자를 위해서 개인 기도법 안내서도 준비되어 있다. 아무도 없는 공간이다. 향내가 남아 있음이 사람이 머물다 간 자리로 짐작되며 온기를 느껴진다. 필요한 자료를 간추려 좌복을 깔고 부처님 전에 공양을 올린 후 삼배를 드렸다. 관세음보살님 상호를 관하니 내 마음이 편안하다. 인자하게 염화미소로 답하신다. 순서대로 천수경과 신묘장구대다라니 21독을 하고 참회 진언과 정근, 발원문을 염했다. 벼랑 끝에 선 상황에 어디서 간절히 원하는 말이 줄줄 나오는지 나 자신이 의아하다.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렸다.

몰입하여 기도하다 보니 두근거림이 없어지고 안정이 된다. 새벽 한 시가 가까워지는 시간이다. 법당문 밖을 나오려다 부딪칠 뻔 하여 살펴보니 남편 복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남편도 착잡하고 잠 못 이루기는 매한가지였으리라.

그 날의 조직검사결과는 부인하고 싶었다. 지인들이 병고에 시달릴 때 호스피스가 되어 도와주려고 존엄사교육도 수료했는데 내가 암이라는 소리를 듣고는 냉정해질 수가 없었다. 분노에 떨며 주체할 수 없는 눈물까지 흘렸다. 사십 년 동안의 결혼 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결혼하고 보니 남편은 위 수술을 받은 지 일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었다. 소식으로 하루에 너댓 번에 걸친 남편의 식사조절에 신경 써야 하였기에 내가 근무하던 국가공무원 생활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두 달에 한 번 꼴로 병원 신세를 지고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결혼 초부터 이십 년 동안의 생활은 신심이 깊지도 않았던 나에게 부처님을 향한 기도에 매달리게 한 것만 같다. 시어머니 말에 의하면 동네 사람들이 위 수술 받으면 십 년도 못산다며 걱정하였는데 손자 둘까지 낳아줘서 고맙다고 하였었다. 시부모님은 자식을 앞세우는 운명이 될까 봐 노심초사하였었다. 그럴 때마다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면서 쉰 살만 넘게 살게 해달라고 빌었었다. 한 달에 두 번 정해진 동참 기도에 열심히 하였고 경전 읽기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식사관리에 우선하여 신경을 썼더니 남편은 감기도 걸리지 않는 체질로 변하였다.

두 번째의 이십 년은 잦은 병원비와 학비지출이 많아져 가자 내가 경제생활에 뛰어들게 되었다. 화장품 대리점을 하면서 절에 가는 날에는 근처에 사는 신도들을 동승시키는 봉사도 겸하였다. 활발한 활동으로 인하여 빚이 났던 것을 다 갚을 만큼의 생활이 되었다. 나는 이십여 년의 영업활동 속에서 긍정적인 생각으로 많이 바뀌었다. 겉은 웃고 있었으나 몸속에서는 이상증세가 나타났다. 몸이 지쳐갈 무렵 두 번의 척추 수술로 영업활동을 접게 되었다. 

세 번째의 이십 년은 남편도 꺼리는 시어머니 치매 수발까지 했던 나에게 이 고통을 주느냐며 며칠간은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뜻하지 않게 뇌경색이 찾아와 보름간의 입원 후엔 내가 모시게 되었다. 의사 선생님은 퇴원 후에는 치매가 심하게 올 거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기저귀착용은 물론이며 밖으로 나가면 집을 찾지 못하는 배회성 치매와 수면장애가 동반하였다. 미래에 나에게 다가올 모습이 저 모습이려니 여기며 혼자 두지 못하고  이십사 시간을 정년으로 퇴임한 남편과 둘이서 몇 년을 보살폈다. 

어머니와 말벗이 되기도 하고 사소한 기억에도 내가 칭찬을 하면 마음이 편해지는 듯 웃곤 하였다. 어머니는 정신이 왔다 갔다 하는 미안함에서인지“죽지 않아서 어떡할꼬.”를 연발했다. 그럴 때마다“아직은 더 살다 오라고 하네요. 부처님이 오라고 해야 가지요.”라고 하면서 계속된 반복 대화를 했다.“맞다. 언제 오랜 할 건고.”하는 치매 언어와 얼굴은 어린애 같다. 사십여 년을 가까이서 지냈어도 자식으로서 해드려야 할 효도가 더 남았다고 여기며 삼여 년 동안 정성을 다했다. 장병(長病)에 효자 없다더니 가족의 삶의 질은 떨어져  갔다. 어머니는 화장실 출입이 불가능해지자 요양원으로 모셨고 95세이다.

그런 나에게 암이라니. 거부할 수밖에 없었고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았다. 병의 치료를 위해선 원인을 찾아내어서 달래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했다. 나에겐 척추 수술 후에 찾아온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시어머니의 배회성 치매에 따른 수면장애와 장기간의 약물 과다복용도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의료진의 치료과정보다도 뒤에 따라오는 후유증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암이란 말만 들어도 두려운 건 사실이다. 한 번의 수술에 스물두 번의 항암과 서른 번의 방사선 치료를 받아야 하는 괴로움이 뒤따라서이다. A 병원에서 왼쪽 가슴의 미세한 부분일지라도 추가발견이 되지 않았다면 두 번 수술에 두 번의 항암 주사 과정을 거쳤을 것이 아닌가. 내가 사십 년을 부처님 곁에 항상 머문 가피였다.‘부처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항암 주사 1차를 맞은 후를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세수를 하면서 이마를 쓸어 올리자 한 움큼씩 빠지며 가슴이 미어지게 하였다. 손톱 발톱이 부서지며 발가락 살을 찔러대며 다섯 번의 수술도 받아야 했다. 책 한 권 드는 것도 팔이 아파 힘들어졌다. 모든 세포를 죽인다는 빨간 주사를 맞으니 구토와 가래 기침은 물론이고 괄약근까지 늘어나 신체를 주체할 수 없어졌다. 일주일이 지날 즈음 건강한 세포가 활동하는 시기에 이르면 차츰 제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신체 내에서도 세포끼리 약육강식이 일어나는 것일까. 곱던 피부색이 검게 변해 갈 때는 우울증에 빠지기도 하였다. 

삼십 회의 방사선치료를 받을 때 양쪽 가슴이어서 다른 사람의 두 배의 방사선량을 투여 받았다. 횟수를 거듭하며 열다섯 번이 지나자 점점 나른해지다가 조사(照査) 부위(部位) 열기 때문에 얼음찜질해야만 했다. 김포공항에서 집으로 오는 서너 시간 동안 냉찜질을 할 수 없었던 상황이 화상으로 이어졌다. 살갗이 벗겨지고 진물이 나는 것에 몸서리쳐진다. 

존엄사 교육을 접하면서 알게 된 수상 스님은 수술 후 제주에 내려왔을 때“이만하길 다행입니다.”라면서 다독거려 준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왼쪽가슴도 부처님 덕이고 오른쪽가슴도 부처님 덕이다. 한꺼번에 수술할 수 있게 된 것도 기도 덕분이다. 백번이 넘는 주사를 발등으로만 맞으면서 한고비를 넘었다. 스님이 기도하며 말기 환우에게 힘과 위안을 줄 수 있는 물품이 단주여서 매달 약간씩 보시하는 중이었다. 내가 버킷리스트 상에 작성한 목표의 반을 넘어섰을 때 조기암이 발견된 것이다. 나에게 약사여래부처님으로까지 나투셨나 보다.

시어머니를 생불(生佛)로 여기며 생활해 오던 나에게 조기 발견하게 해준 것도 부처님의 덕분이라 생각한다.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에서 봉사하라는 은혜처럼 느껴진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정신적 지주였던 고모할머니 스님은 생전에“오래 살려면 참고 희생하면서 내 것을 아끼고 많이 베풀라.”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친정엄마는 사라봉 보림사에서 실시했던 가사 불사에 참여했다. 오직 기도하는 마음으로 한 달 동안 손바느질로 가사불사를 세 벌이나 하셨다. 큰 스님이 재단해주는 대로 일정한 바느질 솜씨를 나타내었다. 나의 불심도 머리에 정대하고 시민회관에서 회향하는 가사 불사를 보면서 돈독해졌다. 엄마는 재물이 없자 기도하면서 몸으로 공양물을 올린 것이다. 일심으로 기도하면 방하착의 자세가 된다. 

청견스님의‘절수행법’을 공부하면서는 소책자를 사서 제주의 불자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삼천 배를 세 번이나 동참하였더니 뭉클한 환희심이 일었다. 내 몸을 관하면서 절수행하는 법도 배웠다. 스님의 죽비소리에 맞추어 절을 하며 기도한다. 이삼백 명이 한  시간동안 삼백 배씩을 절을 하고 쉬는 시간 십 분씩 하면 열 시간이면 삼천 배를 마친다.  쉬는 시간 십 분 동안 넓은 공간이 하얀 김으로 가득 차는 기이한 현상도 보았다.

이 수기를 쓰다 보니 나름대로 쌓은 모래성이 사그라질까 봐 망설이기도 한다. 내 삶이 아무리 괴로워도 세월이 지나고 나면 황하의 모래알로 여겨질 것이기에 부끄럽기 짝이 없다. 물 위에 유유히 떠 있는 오리도 물속에선 끊임없는 발놀림을 하듯이 나도‘성 안내는 공양구’가 되려고 노력도 많이 한다. 나와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과 더 아파하는 환우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보내드리고 싶다.

진흙 펄 속에서 뿌리내렸다가 함초롬히 피어나는 연꽃을 생각하며 맑고 고운 희망을 품었으면 한다. 연잎에 가둬지는 투명한 물방울이 보석처럼 오묘하게 보이며 힘든 이에게 우산이 되어주고 싶은 마음이다. 가진 것은 보잘것없어도 나눠주는 마음이 더 가슴 벅차니 주변 사람에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려 한다.

절에 갔다 오면 마음이 편안하니 정녕 부처님이 내 곁에 있는 것 같다. 부처님, 건강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옴 마니 반메훔. <끝>

/글: 고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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