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始原)에게<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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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始原)에게<47>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07.12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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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동항

                                            박흥식

 

손구락 잘린 문둥이들 건너가고

술상 위 궁뎅이 크게 하고

팔려갔던 계집애들의 납작한 포구

거기, 지나가는 자 하나

숙이 허벅지만한 한치 한마리를 사서

뜨거운 길바닥에 앉아

얼굴에 고추장 빨갛게 바르고 빨고

한낮의 하얀 소리

먹고 잘라먹고 남기고 일어서서 갔다

바다 건넌

붙이지도 못한 꽃도 없는 능소화 한 척

험한 초록만 잔뜩 짙었는데

어리고 대나무 짚고 홀로 베옷 입은

암표범 같은 계집아이

까만 번들거리는 볼때기로 지나가다

얇고 길고 붉은 입술로 똑바로 마주서서

흘기듯 눈꽁댕이 남기고 갔다.

 

- 『아흐레 민박집』 (창비, 1999)

 

녹동항은 전남 고흥에 있는 작은 항구다. 근처에 소록도가 있다. 문둥병을 숨긴 채 외박이라도 나갈 수 있으면 바람 쐬는 곳이 녹동항일 것이다. “납작한 포구”가 말해주듯 남루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제주항에서 녹동항까지 배로 네 시간 거리다. 요즘은 저가항공이 생겨 비행기 삯이 배 삯보다 저렴한 경우도 있지만 배는 오랫동안 뭍을 오가는 섬사람들의 교통수단이었다. 3등 객실에 누워 멀미를 참으며 건너는 바다. 스무 살 무렵 무작정 배를 타고 완도에 간 적이 있다. 그때 기관실 근처 작은방에서 선원들이 선데이 서울을 펼쳐놓은 채 화투를 치고 있었다. 기우뚱거릴 때마다 몸을 휘청거리는데 선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화투를 쳤다. 그 모습이 마치 구름 위 신선들 같았다. 선원들이 좁은 방에서 화투를 쳐도 배는 완도까지 무사히 운항했다. 그때 나는 허름한 여인숙에서 하룻밤 자면서 항구의 냄새를 물씬 맡을 수 있었다. 못난 사람들은 밀리고 밀려 항구에 당도하게 되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아직 어려 항구의 문법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항구의 바닷바람을 온전히 느끼고 싶어 일부러 술을 마시고 항구 주변을 배회하곤 했다. 바다 건너 도착한 작은 항구, 2층 여인숙 끝방에서 시를 쓰고 싶었지만 결국 시를 쓰지 못했다. 그때 시를 썼다고 해도 항구 앞바다에 버렸을 시였겠지만.

/현택훈(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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