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향학열 출재가 불교교육으로 회향
상태바
끝없는 향학열 출재가 불교교육으로 회향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07.12 13: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불교의 주춧돌, 당신을 모십니다 <4-1> - 태고종 원로위원·금붕사 주지 수암 스님 -

태고종 원로위원이자 금붕사 주지 수암 스님은 세수 70세를 훌쩍 남긴 초로에도 공부에 대한 열정만큼은 젊은이들 못지않다. 이번 호에는 한국불교 태고종단의 대표적 학승으로 꼽히는 수암 스님을 두 번에 걸쳐 지면에 모신다.  <편집자 주>

 

속세 나이 40대 중반 선암사 강원 입교
수없이 찾아오는 쉼의 유혹 뿌리치며 정진

 

수암 스님은 1959년 사라사서 이성봉 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후, 1959년 사라사서 방동화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 1975년 서울 신촌 봉원사서 묵담 스님을 전계사로 대승계를 수지한다. 1980년 선암사 승가대학을 4년 수료했으며, 1994년 원광대학원 동양종교학과서 불교학을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98년에는 태고종 제주교구 종무원장과 제주불교총연합회 회장에 취임했다. 1999년 제주대 철학과 및 중어중문과 강사를 역임했다. 2000년에는 제주대 대학원 중어중문과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2000년에는 한라불교신문(현 제주불교신문) 발행인에, 2002년에는 태고종 중앙교육원장, 2004년에는 태고종 동방불교대학 부학장 등에 취임했다. 2006년에는 제주대학원 중어중문과서 박사학위를, 2014년에는 중앙승가대학원서 역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는 한국불교 태고종 원로위원, 중앙강원 대교과 강주, 태고제주강원 강사와 금붕사 주지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수행자와 중문학자가 함께 풀이한 금강경〉,〈무문관〉 등이 있다.

배우니까 청춘이다’. 이는 평생 공부 열심히 하는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세수 70세를 훌쩍 넘긴 초로에도 공부에 대한 열정만큼은 젊은이들 못지 않은 스님이 있다. 

바로 태고종 원로위원이자 제주 금붕사 주지인 수암 스님이다. 그는 끊임없는 자신의 향학열을 출·재가 불교 교육으로 회향하며, 수행 방편으로 삼아온 수암 스님(태고종 원로위원·금붕사 주지)이 그런 인물이다. 스님에게 공부는 평생 화두였다. 제주대 중문과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에도 스님은 종단은 다르지만 지난 2008년 중앙승가대 대학원 불교학과에 입학해 논문을 발표하고, 학술박사 학위를 받았다.

태고종의 대표적 학승으로 꼽히는 수암 스님은“공부는 내 평생의 업이자 수행 방편입니다.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것 자체에 큰 기쁨을 느끼기 때문에 공부하는 것이 언제나 즐겁습니다.”

스님이 이렇듯 학승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것은 집안 내력과도 연관이 있다. 1926년 10월 화주 김대승각 스님과 도감 이성봉 스님이 초가 법당을 세우면서 금붕사는‘화엄사 제주포교소’로 허가를 받는다. 김대승각 스님은 수암 스님의 증조할머니고, 이성봉 스님은 외할머니다. 특히 이성봉 스님은 제주지역에 정법을 바로 알릴 교육기관이 없음을 안타까워했으며, 민간신앙과의 융화로 변색된 제주불교의 본 모습을 찾는 일이 급선무라고 판단해 불교의 근본 정신을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1932년 최청산 스님을 강사로 모시고 제주도내서 처음으로 승려교육을 실시한다. 당시 승려 교육에는 많은 도내 학인 스님들이 참석했다고 전해진다.

“선대 어른들이 절을 창건하시면서 교육에 힘써온 정신을 이어받아 공부하는 사찰 가풍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배워서 불교를 알아야 남에게 포교를 할 수 있는 법이죠. 자신이 모르는데 누굴 포교합니까? 공부하지 않고 전법에 힘쓴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셈이죠.”

왜곡된 불교 풍토와 일재 잔재 청산에 노력한 이성봉 스님은 제주도민들의 최대상처인 4.3 사건 당시인 1948년 토벌대에 의해 총살되는 비운을 맞는다. 그 아픔을 딛고 다시 수암 스님의 이모인 법인 스님이 법맥을 이었다.

1940년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 출신인 수암 스님은 아버지를 따라 전남 여수로가 고등학교를 마치고, 1961년 금붕사서 행자생활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출가자의 길을 걷게 된다. 1964년 군대 제대 후, 1965년 금붕사 감원과 1973년 금붕사 주지로 취임한다. 20여 년 동안 사찰의 안정과 신도 포교에 진력하며 금붕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스님은 속세 나이 40대 중반에 들어서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린다. 신도들을 올바른 불법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늦은 나이지만 공부의 중요성을 깨닫고, 1986년 순천 선암사 강원의 문을 두드린다.

“공부라는 놈이란 참, 녹녹치 않더군요. 만학에 뛰어들다 보니 어려움이 많더군요. 보따리를 싸고 싶을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공부한 내용이 이해 되지 않으면 그때만큼 속상할 때가 없었죠. 늦게 시작한 만큼 젊은 도반들이 쉴 때도 참고 견디면서 공부 했습니다. 수없이 찾아오는 수마(睡魔)와 번뇌, 쉼의 유혹을 물리치며 원을 세워 공부 삼매에 빠져 정진했습니다.”

전법에 열중하면 그게 바로 중생 불사 원력
방통대·원광대·제주대·중앙승가대학원서 학위

 

공부하다 힘들면 수암 스님은 태고종 종정을 역임한 묵담 스님을 찾았다. 그럴 때마다 큰 스님은 수암 스님이 왜 자신을 찾았는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리곤“경전 속에 모든 것이 담겨있으니, 강사 스님을 부처님으로 모시고 공부에 열중하라”고 불호령을 내리셨다.

“큰 스님께서는 논밭사서 불사하려고만 애쓰지 말고 공부해서 전법에 열중하면 그게 바로 중생 불사라며,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라고 경책을 내리셨습니다. 그게 오늘날 저를 학승으로 이끌어준 셈이죠.” 

이후 수암 스님은 졸업하기 어렵다는 제주방송통신대학(중어중문학과)을 4년 만에 졸업하고 1994년 원광대 동양종교학과에 입학해‘불교학’을 전공한다. 여기서는‘대승기신론’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숱한 고비를 넘기면서 불이 붙은 수암 스님의 공부에 대한 열정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다시 2000년에 제주대 중어중문학과서‘불전 어음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는다.

이에 앞서 수암 스님은 1998년 제주대 일반 학생을 대상으로 교양과목인‘한자의 이해’강의를 제안 받고 강의에 매진했다.“처음 제가 강의실에 들어서자 학생들이 놀란 눈을 크게 뜨고 신기한 듯 위·아래로 시선을 계속 옮기더군요. 삭발염의하고 승복 입은 교수가 일반 학생들을 지도한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호기심을 유발시켰던 것 같아요. 수행자로 오히려 더욱더 매사 행동에 조심하며 학생들을 지도했습니다. 후학 양성에 큰 보람을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수암 스님은 일상 생활에 자리잡은 불교 용어에 대한 설명을 많이 전했다. 강의는 너무 지루하지 않게 간단한 퀴즈와 농담을 섞어가며 재미있게 진행했다. 효과는 빨랐다. 200여 학생들이 스님 강의를 신청 하는 등 학생들 사이에선 금방 입소문이 퍼졌다.

“강의하다 많은 젊은이들이 의외로 불교를 잘 모른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그래서 불교용어와 연계하며 일상생활에 필요한 필수 한자를 중심으로 가르치다 보니 학생들의 관심도가 높아졌습니다. 항상‘걸어다니는 포교사’라는 마음가짐으로 불교적 테두리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니 오히려 종교와 상관없이 수강생들이 점차 늘어나더군요. 그만큼 우리 불교가 한국인들의 정서와 사상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다음호에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