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종성을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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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종성을 들으며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07.26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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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제주불교 중흥조 봉려관 스님 탄신 152주년 기념 - 제3회 신행수기 공모 가작

제주불교 중흥조 봉려관 스님 탄신 152주년 기념 제3회 신행수기 공모에서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을 통해 인생의 아픔을 희망으로 전환해 가는 감동적인 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번 호에는 가작 김성배 불자의‘아침종성을 들으며’를 싣는다. <편집자 주>

 

정유년 3월 따스한 봄날. 길을 떠나 제주로 왔습니다.

아는 친척이 있는 것도 아니요, 무작정 출발하여 하늘 길을 열고 제주까지 오기는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비록 몸은 가벼운 맘으로 이끌고 왔으나, 마음은 강원도 치악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해 봅니다.

이 몸을 세상에 빛으로 보게 하신 자비하신 어머니! 

그동안 병고에 제대로 된 치료약조차 없이 자연의 순리 데로 그냥 순응하자며 지낸 세월이지만, 오히려 이러한 상황이 사바정토 성지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 잔치는 아닐런지요.

살다보면 때론 칼이 가다가도 빛나는 강철 끝에 꽃이 피는 것. 이것이 무슨 신통한 일이 되겠습니까? 만은 꿈속 같은 현실의 세계는 마치 살아 숨 쉬듯이 우리의 삶을 인연의 영락발로 비추어 줍니다.

늘 그러했듯이“살다보니 살아 지드라”는 말이 있지요. 어느덧 반복되는 일상 속에 새벽이면 일어나 씻고 앉아 아침종성을 들으며, 말없이 달마의 벼루에 관음의 청정수를 떨어뜨려 유마의 먹을 갈아봅니다. 

싸~악 써~억 깃털처럼 가볍게 돌아 갈 바도 없이 돌고 돌아가는 검은 먹빛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이며 가만히 장봉에 보현의 붓을 들어 문수의 글줄을 엮어봅니다.

저는 화가입니다. 미술작가가 작품을 만들어 그것으로 생활한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도 불교의 선이야기를 담은 것이라고들 하지만 누가 있어 이 바쁜 세상에 눈 열고 귀 담아 듣고자 하시겠는지요. 선이란 것도 그 이름이 선이지요. 하나의 명자로서, 한자나 한글로도 읽어도 禪(선)은 仙(선)이요, 宣(선)도 善(선)일 뿐입니다. 

젊은 시절 대학에서 미술교육을 전공한 저는 틈틈이 그림을 그리며 모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예술을 통하여 아름다운 인성을 가꾸며 참되고 바르게 살아가도록 인도하는데 공직자로서의 온 힘을 쏟아 부었습니다. 퇴직 후에 가끔씩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제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천직이라고 생각했던 교직에 대한 보람이 상기되곤 했지요. 인생 1막을 마치 연극하듯 마치니 이어 인생 2막의 장이 펼쳐집니다. 

그동안 새벽에 일어나 출근 전에 맞추어 하던 그리고 짓고, 쓰는 일이 자유롭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몇 년 전 부터 어머님 간호에 매달린 저로서는 그마져도 용이하게 진행되지는 못했습니다.

더구나 기억을 잃어 가시는 어머니를 상대하여 돌본다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지요. 우리가 어떤 실상을 바로보고 안다고 해도 행하고 실천하는데 있어서 안팎으로 자유로워 걸림이 없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러니 수행이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지요? 실제 생활에서 장애가 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이야말로 누구나 꿈꾸는 행복한 길이 아닐는지요? 함덕 서우봉에 올라 바다를 보았습니다. 인공의 소리가 사라진 덕산의 숲은 적멸의 극락전을 자신의 자성지에 건립하며,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해보았습니다. 이 세상 모든 이들의 건강과 행복을 빌며 나아가 일체 유, 무정 생명의 안락함을 기원해 봅니다. 

“극락의 정토는 죽어서나 가는 걸까요?”

조선시대에 제주 대정에 유배 온 추사 김정희는 대정향교에‘의문당’이라는 현판을 썼습니다. 학문을 공부함에 있어 의문을 갖고 탐구하라는 뜻이겠지요. 왜, 어째서 그럴까?라는 선가의 화두를 들어 타파하는 것과 같이 그 힘의 원천은 자성불의 원력은 아닐 런지요?

두드리는 자에게 문은 열립니다. 알려고 한다면 필경에는 알아내시겠지요. 대지가 아무리 옥토라 하여도 씨 없이 어찌 열매를 거둘 수 있겠는지요. 긴 겨울을 지나서 피는 매화의 향기와 수선화의 강인한 생명력은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들이 각자 지니고 계시는 자성의 생명력이 아닐 런지요?

지금 생각해 보니 시작은 이러했습니다.“나도 부처처럼 깨친 사람이 되어 보자”라고요. 그래서 자신이 정한 최초의 아호도‘걸신’이었습니다. 1987년 초부터 서양화를 하던 저는 어느새 모필 붓을 들어 드로잉을 시도하면서부터 그림을 통해 사물과 자신을 하나로 연결하며 알아차리는 不二 中道(불이 중도)의 무문관을 서화로 풀어냈던 것입니다. 

깨달음의 그림 선서화! 저는 선서화를 이렇게 불러보았습니다. 

‘말없이 말하는 그림’이라고요. 1991년 5월 봄날 제1회 개인 선서화 수묵전을 펼치며 그림 가운데 저의 이야기를 서화로써 함께 풀어보았습니다. 깨치지 못하면 한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것, 행할 수도 없는 것. 깨지 못한 즉 알지 못하니 무명으로 죄의 업만 더하다 속절없이 가겠지요. 이 몸 받아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났을 때 하루 빨리 부지런히 정진하여 자신의 본래 주인공을 속히 깨쳐 참 나를 알고 더불어 모두 다 같이 하는 동락의 즐거움 속에서 아름답고 행복한 나라를 만들어 영원토록 함께 살아야 하지 않겠는지요.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저는 거울 속 제 웃는 모습을 보다가 찰나에 스쳐가는 섬광 하나로 제 본래 얼굴을 비추어 본 것일까요?  

이미 그대로 하늘은 푸르고 바람도 솔솔 새들은 노래하고 철쭉도 활짝! 봄을 노래하건만 어찌하여 봄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이셨나요?

“저의 경계가 과연 확실한 것일까?”

그리하여 한글로 번역된 육조단경으로부터 시작하여 화엄, 법화, 금강, 반야, 열반 등 경전의 바다에서 배를 띄우고 순풍에 돋을 달고 나아가듯이 바람결에 술술 풀리기도 하였으나 막상 경계라 할 수도 없는 경계에 부딪치면 출렁이는 물결에 흔들리는 꽃잎처럼 일렁거리며 춤을 추기도 했었지요.

 화엄경에 있는 내용입니다.

“마음은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아서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드나니, 일체 세간이 마음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현상은 어떠한 마음을 내어서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서 갖가지 형상으로 나타내집니다. 

미운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면 미운 그림이 그려집니다. 

아름다운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면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지지요. 

지옥중생의 고통도 극락세계의 행복도 마음의 작용이 듯이,“세상이 청정해 지려면 마음이 먼저 청정해져야 합니다.”고 흔히들 말들을 합니다만 마음은 청정함도 오염됨도 아니지요. 

어찌 보면 우리는 이미 청정국토에 와 계십니다. 이 청정한 국토에서 마음하나 잡을 수 없으니 흔들리고 놓치고 마는 겁니다. 마치 도공이 그릇을 빚을 때 물레 위 원판에서 중심을 잡지 못해 만든 형상은 놓쳐 그만 주저 않고 말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불교행사 예식을 할 때 마지막으로 함께 부르는 반야심경은 말합니다. 진실상은“무너지고 더하고 낳고 사라짐도 없다.”고요. 우리의 인식과 생각이 일체 것을 만들고 있다기에 화엄경에서는“일체유심소조”라 합니다.

오늘의 행복도 불행도 우리가 스스로가 그리고 짓는 것이지요.

금강경에도“범소유상 계시허망”이라 했지요. 일체가 꿈속에 꿈이요 봄날 바람결에 왕 벚꽃 피고 지듯 하지만 태어나 참 나를 확실히 깨칠 바도 없이 아시고 잘 살다, 갈 바도 없이 가야겠지요. 봄날 꿈속 같은 이 세상에서 이왕이면 오늘도 돌아 갈 바도 없이 돌아가시는 세상의 판에서 각자가 멋진 그릇을 만들어 잘 사용하고 가시길 기원하며, 인생이란 스케치북에 멋진 그림을 그려 넣어야 하지는 않겠는지요?

오늘도 아침종성을 시작으로 하루해를 열어봅니다. 

시방에 일체장엄!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원만보신 노사나불,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 

삼보 전에 두 손 모아 합장하며 자성 불에 삼배를 올립니다.

 

/김성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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