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법문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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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법문 (7)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07.26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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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법문-초기불교의 특징은‘해체해서 보기’

초기불교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해 보라면 주저 없이‘해체해서 보기’라고 대답할 수 있다. 부처님 제자들 가운데 영감이 가장 뛰어난 분으로 칭송되며 시작詩作에 능했던 왕기사 존자는「천명이 넘음 경」(S8:8)에서 부처님을“부분들로 해체해서 설하시는 분”이라고 찬탄하고 있다. 

여기서 해체는 빠위밧자pavibhajja 또는 위밧자vibhajja를 옮긴 것이다. 위밧자라는 술어는 빠알리 삼장을 2,600년 동안 고스란히 전승해 온 상좌부 불교를 특징 짓는 말이기도 하다. 그들은 스스로를 위밧자 와딘vibhajja-vaadin, 즉‘해체를 설하는 자들’이라고 부르면서 자부심을 가져 왔다. 

그러면 무엇을 해체하는가? 개념paňňatti 施設을 해체한다. 개념을 무엇으로 해체하는가? 법dhamma 法들로 해체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첫째> 존재하는 모든 것을 법으로 해체해서 보면 자아니 인간이니 중생이니 영혼이니 우주니 하는 변하지 않는 어떤 불변의 실체가 있다는 착각이나 고정관념을 깰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이렇게 법들로 해체하면 이런 법들의 찰나성-無常이 드러나고, 찰나를 봄으로써 제법諸法이 괴로울 수밖에 없음에 사무치게 되고, 제법은 모두가 독자적으로 생길 수 없는 연기적 흐름-無我이라는 사실이 극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자아니 인간이니 하는 개념적 존재를 뭉뚱그려 두고는 그것의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통찰할 수 없다. 그래서 아비담마는 존재 일반을 철저히 법들로 분해하고 해체해서 제시하는 것이다. 
‘나’라는 개념적 존재는 오온으로 해체해서 보고,‘일체 존재’는 12처로,‘세계’는 18계로,‘진리’는 사성제로,‘생사문제’는 12연기로 각 해체해서 보면 모든 법sabbe dhamma-諸法의 무상·고·무아가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이러한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통찰함으로써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 그래서 해탈·열반을 실현한다는 것이 초기불전의 450군데에서나 강조되고 있다.

아름다운 여인의 눈과 코와 입술이 아무리 예쁘다 할지라도 그것은 전체상과 부분상을 이루고 있을 때 우리는 미인이라고 이야기 하고 그것에서 애욕을 일으킨다. 눈을 빼고 코를 분리하고 입술을 도려내어 알코올에 담가 두었다면 아무도 그것에서 애욕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해체해서 보면 무상·고·무아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염오가 일어난다.

「대념처경」(D22) 등의 초기불전에 나타나는 수행 방법의 핵심도 나라는 존재를 몸身·느낌受·마음心·법法으로 해체해서 그 중 하나에 집중samtha하거나 그 중 하나에 대해서 무상·고·무아를 통찰vipassanā하는 것이다. 

해체해서 보지 못하면 불교적 수행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나와 존재와 세상과 진리와 생사 문제를 이처럼 5온·12처·18계·22근·4성제·12연기로 해체해서 보지 못하면 깨달음을 실현할 수 없다. 

뭉쳐 두면 속고 해체하면 깨닫는다. 세계를 공空으로 보려는 것이 반야중관의 직관적인 시각이고, 세계를 깨달음의 입장에서 아름답게 꽃으로 장엄하여 보려는 것이 화엄의 종합적인 시각일 것이다. 이에 반해 초기불교는 세계를 법으로 해체해서 봄으로써 깨달음을 실현하려는 해체적인 시각이다.

설령 해체해서 보지 않고 직관만으로 나와 세상을 공空이라고 보았더라도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결국 해체를 설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아비담마나 아비달마, 유식처럼 분석을 강조하든, 반야중관처럼 직관을 강조하든, 화엄처럼 종합을 강조하듯, 그것은 불교적 방법론인 해체에 토대를 두어야 할 것이다.   

해체의 토대를 튼튼히 한 뒤에 직관과 종합을 강조해도 늦지 않다. 직관이나 통합만을 강조해 온 한국불교에는 초기불교의 해체적 시각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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