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스트 비판하며 자연철학의 합리주의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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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스트 비판하며 자연철학의 합리주의 수용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6.10.21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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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의 창시자 소크라테스 ① 

 

이번 주 인문학 특강에는 서양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이야기다.‘너 자신을 알라’고 한 유명한 말로 기억되는 아테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어떤 철학자인가. 지난 14일 제주대학교 아라철학회에서 특강으로 마련한 문성학 교수(경북대 철학과 교수)의“윤리학의 창시자 소크라테스”에 대해 일부를 실었다. <편집자 주>

 

소크라테스는 탈레스처럼 
인간들의 사회적 행위들의 아르케를 
밝혀내려고 했던 것이다

 

철학의 수호성인으로 칭송받고 있는 소크라테스(Socrates,469-399 B. C.)는 소피스트들과 동시대의 그리스인이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소피스트들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이 자연의 문제에 몰두한 것에 반대하고 인간 문제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사람들이었다. 소크라테스도 소피스트들의 영향을 받아 인간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학풍의 이러한 변화는 가히 혁명적인 것으로, 우리는 이러한 변화의 원인들 중의 하나를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B. C. 440 년경에 활약) 의 자연철학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아낙사고라스는 선대 철학자들이 남겨놓은 운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누우스(Nous, 정신)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이리하여 정신과 물질이 개념적으로 구분되기에 이르렀으며, 이러한 구분은 필경 사람들로 하여금 정신과 물질의 관계에 관한 문제에 눈뜨게 하였다. 아낙사고라스에 의하면 정신은 질료 즉 물질을 분리하거나 결합하는 힘이요 질료를 지배하는 힘이다. 소크라테스는 정신이 만물의 운동의 궁극적 원인이라는 아낙사고라스의 주장에는 동의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낙사고라스가 정신과 물질의 관계를 기계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한다. 하여간 아낙사고라스가 철학의 영역에 도입했던 정신과 물질의 관계 문제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 문제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연철학적 사변에 환멸을 느끼고 전통적인 귀족정치에도 불만을 느꼈던 일군의 사람들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위를 제창하면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으니 그들이 다름 아닌 소피스트들이었다.

소피스트들의 사상과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먼저 그들이 살았던 그리스의 그 당시의 정치, 사회, 종교적인 제반 여건에 대해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귀족과 평민들 간의 오랜 투쟁 끝에 그리스에는 민주주의가 꽃피게 된다. 물론 고대그리스의 민주주의는 현대의 민주주의와는 다르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 중에서는 그 국민들이 한자리에 다 모일 수 있을 정도로 소규모인 경우가 있었다. 그러므로 대의정치가 불필요하였으며 모든 시민들이 정치가이며 동시에 입법자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파적인 감정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사람들은 국가의 이익보다 당파의 이익을 더 중시하게 되었고, 이러한 당파주의적인 사고방식은 더욱 더 악화되어 사람들은 결국 당파의 이익보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 탐욕, 이기심, 야심, 횡령과 같은 것이 그 시대의 정치적 상황의 특징을 이루고 있었다. 

민주주의가 이런 식으로 번성하게 되면서 종교는 쇠퇴하게 된다. 물론 우리는 종교가 쇠퇴하게 된 원인을 그리스인들의 다신론적 종교 자체의 비도덕성에서도 찾을 수 있다. 아무리 추잡하고 불명예스러운 일이라도 신들의 예로써 정당화 될 수가 있었다.

종교의 쇠퇴를 가속화시킨 또 다른 요인은 학문의 발전에서도 찾아질 수 있다. 학문의 발전은 그 당시의 종교적 믿음의 무근거성을 폭로하기 시작하였다. 크세노파네스(Xenophanes, B. C. 6세기 경)는 그리스 종교의 신인동형설석인 경향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그는 소나 말이나 사자에게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손이 있다면 소는 소를 닮은 신을, 말은 말처럼 생긴 신을, 사자는 사자와 닮은 신을 그릴 것이라고 했다.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 540 B. C.경)와 테모크리토스(Demokritos, 460-370 B. C.) 역시 종교를 경멸하였다. 인간주의와 회의주의가 그 당시의 그리스인들의 사고를 지배하였다. 부정적, 비판적, 파괴적 사고가 득세하게 되면서 그때까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일체의 도덕, 관습, 권위가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으며 거침없이 부정되었다. 이러한 정치, 사회, 종교적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을 남에게 보다 더 잘 설득하기 위하여 수사학과 변론술을 가르쳐주는 사람들을 요구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여 등장하게 된 일군의 직업적인 선생들이 소피스트들이었다. 그러므로 소피스트들은 자기 시대의 그러한 도덕적 혼돈을 이론적으로 정당화시켜준 현실주의자들이요, 그 시대의 아들이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 시대의 윤리적 상황을 한마디로 도덕적 혼돈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소크라테스는 시대의 조류에 맹목적으로 순응하기를 거부하고 새로운 도덕적 질서를 확립하려 하였다.         

소피스트들과 동시대인이었던 소크라테스는 기존의 모든 권위가 붕괴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소피스트들의 인간중심주의가 빚어내는 해악을 염려하였다. 물론 그도 소피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전통이나 관습 혹은 전통적인 종교를 무비판적으로 맹종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기존의 모든 권위는 이성의 음미에 견뎌낼 수 있을 때에만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이었다.

인간의 행위도 그것이 전통에 부합한다는 이유로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근거를 가질 때에만 정당화 될 수 있다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견해였다. 기존의 권위에 대한 맹목적 추종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의 입장과 마찬가지였다. 소크라테스의 적대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가 젊은이를 타락시키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에는 소크라테스 역시 소피스트들 중의 한 사람에 불과한 존재로 보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작품 『구름』에서 소크라테스를 소피스트들 중의 한사람으로 간주하고 있는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일반대중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들과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점은, 인간중심주의가 윤리적 회의주의에로 나아간다는 소피스트들의 생각에 반대했다는 것이다. 소피스트들은 인간 이성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너무 일찍 포기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이성은 우리들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 있을 만큼 초인간적인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무용한 것도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이성의 인도를 받아 인간의 이기심과 공공선을 조화시켜주는 윤리적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소피스트들은 인간주의(인본주의)를 회의주의와 결합시켰기 때문에 윤리학의 문제영역을 확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개인의 이익과 공공선의 조화라는 관점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소크라테스는 인본주의 속에 전통적인 자연철학의 합리주의적 요소를 수용함으로써 학으로서의 윤리학을 출현시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합리주의적 요소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즉 그는 이성의 능력을 자연철학자들처럼 과대평가하지는 않았다.

소크라테스가 윤리학의 창시자로 간주되는 이유를 우리는 탈레스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에서 찾아볼 수 있다. 탈레스는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적 사물들의 다양성 배후에 공통의 근본물질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미지의 그 근본물질을 아르케(arche)로 불렀다. 그리고 그는 ‘만물의 아르케가 무엇인가?’ 라는 문제를 제기한 뒤, 그것이 ‘물’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제시한 답은 잘못된 것이지만, 그는 ‘물의 아르케는 무엇인가’라는 문제제기를 통해 학문하는 모든 사람들이 던지는 문제들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학문하는 행위란 결국 현상적 다양성 배후에서 작동하는 공통의 원리를 탐문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탈레스는 ‘아르케’를 탐구하려 했는데, 탈레스의 문제를 이어받아 만물의 아르케를 불이라고 말했던 헤라클레이토스에서 아르케는 ‘원리’의 의미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만물의 아르케로 이해된 불은 단순히 물질로서의 불이 아니라, 원리로서의 불이기도 했던 것이다. 근대 역학의 대성자인 뉴톤 역시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적 운동의 다양성 배후에 작용하는 공동의 역학적 원리, 탈레스 식으로 말해서 다양한 현상적 운동의 배후에서 그 운동들을 지배하는 공동의 아르케를 탐구하여 밝혀내었는데, 그것은 바로 관성의 법칙, 가속도의 법칙,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으로 불려지는 운동의 3법칙이었다. 

소크라테스 역시 사회생활을 하는 인간들의 다양한 행위 배후에서 그 행위들을 지배해야만 하는 공동의 행위 원리를 발견하려 했다. 말하자면 인간들의 사회적 행위들의 아르케를 밝혀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 한에서 그는 탈레스의 문제를 윤리학의 영역으로 옮겨 물었던 사람이며, 탈레스가 철학(학문)의 아버지였듯이 그는 윤리학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정리=김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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