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토함산 석불사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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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토함산 석불사 (6)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09.08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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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선생과 함께 가는 사찰순례 (47)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의 대각사 모습

석굴암에 대해 연구한 학자들 중에 빠뜨릴 수 없는 분이 일향 강우방 선생이다. 불교를 연구하는 다른 학자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이분의 경주 사랑은 유난하다. 1967년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무작정 경주에 가서 경주 역 근처에 있는 근화여고의 교장선생님을 찾아가서 학교에서 독일어를 가르치면서 신라문화를 연구하겠다고 당당하게 포부를 얘기했다고 한다. 교사 자격증이 없으니 거절당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망연자실했다고 한다. 그후 미술사를 공부하겠다고 서울대 고고인류학과에 편입했다가 미술사 강좌가 없어서 한 학기만에 그만 두고 덕수궁에 있던 국립박물관 미술과에 임시직으로 들어갔다. 일 년 후 학예직이 되었으나 공부하기 어려웠던 당시 분위기에 사직하고 쉬다가 아예 집을 팔고 가족을 이끌어 경주로 내려갔다. 1970년 경주에서 다시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에 복직하고 12년 간 경주 박물관에서 경주의 유적지들을 답사하며 연구하였다. 1997년 경주박물관장으로 부임하자 맨 먼저 낭산 서쪽 기슭에 파묻혔던 목 없는 보살상을 발굴하여 박물관으로 옮기고, 이십 년 전 불상을 조사할 때 동네 노인들이 근처에 있던 동강난 머리를 오래 전에 박물관에서 가져갔다는 말을 기억해서 박물관에 전시된 많은 불상의 머리 중에 크기가 비슷한 것을 찾아 맞추어 높이 3.85m의 당당한 관음보살상을 복원하였다. 아마 숭유억불의 시대인 조선시대에 파괴되어 불상의 머리는 이리 저리 뒹굴다 팔, 구십 년 전에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몸은 땅에 거의 묻혔으나 상반신이 노출되어 바람에 마모되고, 대좌는 두 동강 난 채 밭두렁에 묻혀 있던 관음보살상이 강우방 선생의 노력으로 퍼즐 맞추듯 맞추어져 다시 온전한 모습으로 탄생한 것이다.

1980년대 초 마흔두 살의 나이로 하버드 대학원으로 유학을 갔다. 거기서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경주에서 시간이 있을 때마다 가서 보았던 석굴암이 뇌리에 떠올랐고, 석굴암에 대해 무엇인가 이루지 않고는 귀국하지 않겠다는 서원을 했다. 그 후 석굴암에 관한 자료를 조사하였으나 당시에는 구체적인 자료나 문헌도 거의 없어서 연구가 전혀 진전되지 않았다. 일본인 측량기사 요네다 미요지가 1942년 35세의 나이로 요절한 후 출간된 유고집에 실린 〈경주 석굴의 조영 계획〉이 유일한 문헌 자료였다. 이 논문에서 요네다는 세밀한 측량을 통해 석굴암이 치밀한 기하학적 설계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석굴암 대불의 크기를 당나라 자로 환산하여 앉은 높이가 1장 1척 5촌, 어깨 폭이 6척 6촌, 양 무릎 폭이 8척 8촌이라고 기록하였다. 강우방 선생은 이 크기가 석굴암 대불을 만든 사람이 임의로 만든 것이 아니라 무엇엔가 근거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러한 크기의 불상에 관한 기록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유기』의 삼장법사의 모델이 된 당나라 현장스님이 인도를 다녀오고 쓴 『대당서역기』에서 뜻밖의 기록을 발견한다. 현장스님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룬 보드가야의 대각사에 있는 불상을 보고 다음과 묘사하였다.

 

‘정사 안에는 불상이 왼발을 괴어 오른발을 위에다 얹고, 왼손을 샅위에 두고, 오른손을 늘어뜨린 항마인을 하여 동쪽을 향해 앉았다. 그 근엄한 모습은 참으로 그곳에 부처님이 계신 것 같았다. 상의 높이는 1장 1척 5촌에 양 무릎의 거리가 8척 8촌이며 양 어깨는 6척 2촌이다.’

 

둥근 어깨에 대한 크기에 작은 오차가 있지만 이 기록은 석굴암 대불의 모습과 요네다의 측량 기록과 같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를 통해 석굴암의 대불은 신라사람들이 석가모니께서 정각을 이룬 순간의 모습을 이 땅에 재현한 것이라고 보았다. 강우방 선생은 이 날을 감격과 흥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2권에는 이 분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실려 있다.

 

1986년 초여름, 동주 이용희 선생이 대우재단 이사장으로 계실 때 '미술사학연구회'의 결성을 준비하면서 실험적인 연구방식으로 신라왕릉 형식의 변천을 공동 답사하는 기회를 가졌다. 당시 경주박물관장이던 정양모 선생의 인솔과 해설로 진행된 그 답사는 다 함께 석불사 석굴에 올라 한 시간 남짓 관람하고 저녁 회식자리를 갖는 푸짐한 ‘보너스’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미국 유학을 마치고 갓 귀국한 강우방 선생은 석불사 석굴의 연구동향을 간략하게 보고하면서 자신은 『대당서역기』에서 그 수치를 찾아냈다는 얘기를 처음 하였다. 그러자 동주 선생은 크게 놀라고 기뻐하며 이렇게 치하했다.

 

“그거 큰 거 발견했습니다. 축하만스럽습니다.”

“크기야 할까요. 다 요네다가 통일신라 자를 복원해서 실측해 제시해 놓은 수치가 있었으니까 가능했죠. 저는 이제 요네다의 석굴연구에서 한 발짝도 못되는 반 보 정도 나아갔죠.”

“반보라! 강선생, 앞으로 아호를 반보로 하시오. 그거 멋있네. 더 나이 들어 사람들이 반보 선생이라고 부르면 더 멋있겠네.”

 

필자는 이 반보선생이 1990년대 초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으로 계실 때 한국불교조각에 대한 대학원 수업을 받았었다. 학기말에 반보선생을 모시고 석굴암을 가면 좋겠다고 답사를 제안하고 수업 참가 학생, 경주박물관 직원과 함께 한밤중에 석굴암을 답사했다. 그 때 유난히 불상의 크기에 관심을 갖던 반보선생과 필자가 석굴암 대불 뒤에 서 있는 십일면관음보살상 앞에서 십여 분 간 멍하니 서있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고운지고 보살의 손

돌이면서 자연(自然) 같다

신라 옛 미인이

저렇듯이 거룩하오?

무릎 꿇어 우러러 만지면

훈향내 높은 나렷한 살기운

당장 곧 따스할 듯하구나.

- 박종화 〈십일면관음보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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