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법문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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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법문 (12)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09.08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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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법문- 인식의 무더기 ⇔ 오온 ④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부처님의 세 번째 대답은 인식 saňňā 想이다. 인식을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오온의 두 번째인 느낌 vedanā 受이 감정적이고 정서적이며 예술적인 심리현상들의 단초가 되는 것이라면, 인식은 이지적, 사상적, 철학적 심리현상들의 밑바탕이 되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perception으로 정착되었다.

<둘째> 감정과 정서와 예술과 편리함의 추구와 관계있는 느낌이 자본주의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면 인식은 이념이나 사상을 중시하는 사회주의와 더 가까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남방 아비담마와 북방 아비달마, 유식에 의하면 인식은 마음과 함께 항상 일어나는 심리현상, 즉 반드시들 遍行心所에 속한다. 그러므로 생명체가 존속하는 한, 그리고 그가 상수멸想受滅, 즉 멸진정滅盡定에 들지 않는 한 인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인식이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부처님께서는 버려야 할 인식과 닦아야 할 인식을 강조하셨다.

<넷째> 잘못된 인식은 버려야 한다. 인식은 대상을 받아들여 이름 짓고 개념을 일으키는 작용이다. 그런데 이런 개념작용은 또 무수한 취착을 야기하고 ·해로운 심리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초기경(M11, 18)의 여러 문맥에서 인식은 부정적이고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래서 “희론戱論하는 인식papaňca-saňňā 등을 가지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각묵 스님

「금강경」은 버리고 극복해야 할 대표적인 인식으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즉 자아가 있다는 인식, 개아가 있다는 인식, 중생이 있다는 인식, 영혼이 있다는 인식을 들고 있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인식들은 단지 인식에만 머물지 않고 존재론적인 고정관념으로 고착된다고 이해한 구마라집鳩摩羅什 스님은 「금강경」에서 이러한 인식을 ‘상想’으로 옮기지 않고 ‘상相’으로 옮겼다. 이와 달리 「금강경」을 한역한 여섯 분의 스님들 가운데 구마라집 스님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분들은 모두 ‘상想’으로 직역하였다.

<다섯 째> “마음은 무상하고, 느낌은 고통스럽고, 일체 법들은 무아이고, 몸은 부정함”에도 범부중생들은 마음은 영생永生하고 느낌은 즐겁고 일체 법들에는 자아가 있고 몸은 깨끗한 것으로[常·樂·我·淨] 여기고 있는데, 세존께서는 이를 두고 인식의 전도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인식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무엇이 넷인가? 비구들이여, 무상無常에 대해서 항상恒常하다는 인식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비구들이여, 괴로움苦에 대해서 행복이라는 인식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비구들이여, 무아無我에 대해서 자아라는 인식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비구들이여, 부정한 것에 대해서 깨끗하다는 인식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네 가지 인식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전도顚倒 경」(AN4:49)

 

『청정도론』에서도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이고, 부정한 대상에 대해서 영원하고, 행복하고, 자아이고, 깨끗하다고 여기면서 일어나기 때문에 전도라 한다.

『반야심경』에서도 이러한 전도를 여의고 궁극적인 행복인 열반을 실현한 것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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