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부처님의 네 번째 대답은 심리현상들(sańkhārā)이다. 중국에서는 상카라(sańkhārā)를 행行으로 한역하고 있다.
상카라는 초기불전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로 크게 네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다.
<첫째> 제행무상諸行無常 등의 문맥에서는 열반을 제외한 모든 ‘형성된 것들’, 즉 유위법有爲法(sańkhta-dhamma)을 뜻한다.
<둘째> 오온의 네 번째인 행은 ‘심리현상들’을 나타내는데 아비담바의 52가지 마음부수心所法(cetasikā dhammā)들 중, 느낌과 인식을 제외한 나머지 50가지 마음부수들을 뜻한다.
<셋째> 12연기의 두 번째 구성요소인 무명연행無明緣行으로 나타날 때는 ‘의도적 행위들’로 해석된다. 이 경우의 행은 업業(karma)과 동의어이다.
<넷째>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행위인 신행身行, 구행口行, 의행意行으로 나타날 때의 행行은 12연기의 두 번째 구성요소인 행처럼 의도적 행위, 즉 업 형성으로 이해한다.
문맥에 따라서는 단순한 ‘작용’을 뜻하기도 한다. 「까마부 경」(S41:6)에 실린 찌따(Citta) 장자와 까마부 존자 사이의 법담法談은 이렇다.
[찌따] “존자시여, 얼마나 많은 작용들[行]이 있습니까?”
[까마부] “장자여, 세 가지 작용들이 있으니 몸의 작용[身行], 말의 작용[口行], 마음의 작용[意行]입니다.
[찌따] “존자시여, 그러면 얼마나 많은 몸의 작용이 있고, 얼마나 많은 말의 작용이 있고, 얼마나 많은 마음의 작용이 있습니까?”
[까마부] “장자여, 들숨날숨은 몸의 작용이고,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 고찰伺이 말의 작용이고, 느낌과 인식은 마음의 작용입니다.”
[찌따] “존자시여, 그러면 왜 들숨날숨은 몸의 작용입니까? 왜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 고찰伺이 말의 작용입니까? 왜 느낌과 인식은 마음의 작용입니까?”
[까마부] “장자여, 들숨날숨은 몸에 속하는 것이고 이런 법들은 몸에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들숨날숨은 몸의 작용입니다. 장자여, 먼저 생각을 일으키고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뒤에 말을 터뜨립니다. 그래서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은 말의 작용입니다. 느낌과 인식은 마음에 속하는 것이고 이런 법들은 마음에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느낌과 인식은 마음의 작용입니다.”
학인學人들 중에서 어떤 분들은 오온五蘊의 행온行蘊도 의도적 행위나 업 형성력 등으로 이해하고 번역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행온의 한 부분인 의도cetanā만을 부각한 잘못된 번역誤譯이라고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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