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어느 포교사 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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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어느 포교사 이야기… <2>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09.21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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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심각 (21기 포교사)

얼마 전 제 나이 60살, 노년기에 접어든 것을 깨닫고 종신보험을 들었습니다. 물론 상조회에도 가입을 해 두었습니다. 나름 우스운 일입니다. 숨이 끊어진 후의 일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지금당장 여기 내 몸 하나, 내 마음 하나, 내 생각 하나 조절하지 못하는 중생이 죽은 후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6년 전 어렵사리 불교대학을 마치고, 제주도에 입성했더랬습니다. 은해사에서 법사스님이 “포교사나 하면 되겠네!” 라고 하신 말씀을 뒤로 한 채였습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절대 포교사는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자문해보니 ‘전도사 노릇도 제대로 못한 것이……’ 였습니다.

77년 그토록 가고 싶은 미대를 못가고 펑펑 울었습니다. 아닙니다. 펑펑 울지도 못했습니다. 그냥 눈물이 나왔습니다. 혼자 홍익대학교 주변을 배회하였습니다. 우리 집이 부자라면 좋은 선생한테 레슨을 받고 미술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을 텐데……. 부모를 원망하였습니다. 잘못 태어난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독교집안의 모태신앙을 안고 세상에 태어났던 터였습니다. 미술대학에 가지 못하는 대신 주위의 영향을 받아 좀 더 가기 쉬운(?) 신학대에 입학했습니다. 고교시절부터 어린아이들의 선생노릇을 했습니다. 신학생 시절에는 벌써 교육전도사라는 직책을 가지고 학생회를 지도하고, 그 후 청년회를 지도하며 목사후보생으로 지위상승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혼하여 임신, 출산. 자녀양육을 하다 보니 세상은 거꾸로 돌아서 있었습니다. 동기들은 모두 나름대로 전국 각지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는데, 나는 집안의 아줌마가 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항상 원을 세우고 계획을 세우지만, 계획대로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8박9일 호스피스 교육을 받았습니다. 최면치료로 어린 시절 애처로운 나의 모습을 보았고, 나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던 분노의 원인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유서를 작성하였고, 나의 장례식모습을 보았고, 소복(수의?)을 입고, 산위에 준비된 관 속에 들어가 땅속에 머물러 보기도 했습니다. 순간, 아무생각도 들지 않고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스님이 치시는 목탁소리만 느껴졌습니다.

서울에 있는 시동생 거사님이 불교대학을 마치며 함께 포교사시험을 보자고 자료를 보내왔습니다. “포교사는 안 할래요” 대답은 했지만, 카페에 앉아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호스피스 포교사가 되자!’라는 마음과 함께.

독학으로 공부를 하여 예비 포교사가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물론 기독교방식의 기도였지만 간절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가 없었더라면 제가 여러분 앞에 서있지 않고, 어느 술집에서 젓가락을 두드리며(그 당시 70년대의 술집은 대강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술을 마시고 있었을 것입니다.” 라고 학생회 토요집회에서 설교하였습니다.

이제 포교사로서의 길을 혼자 힘으로 해내야 할 터였습니다. 포교사 품수를 받고 제일 먼저 남정 스님을 만났습니다. 마하보디호스피스에서 함께 했던 스님이 마침 관음사에 오셨습니다. 약속을 했지만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조급하여 당시 열심히 호스피스 활동을 하고 계시는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함께 암 병동을 돌며, 불자들을 위로하고 염불기도를 드렸습니다. 시다림이 있는 날은 밤늦게까지 장례식장에 머물렀습니다.

아직 제주 포교사단에는 호스피스팀이 없었습니다. 내가 호스피스팀을 만들어 보겠노라고 노력과 다짐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예포시절 소년원 실참 후 교정교화팀에 소속되었습니다. 달마다 소년원 법당에서 법회를 드렸고, 십여명의 학생 중 1명과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절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며 말리는 가족들의 염려를 차치하고, 매주 멘토링을 갔습니다. 한 살 때 엄마가 가출을 했기 때문에 그 아이는 자기는 한 살 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선 신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갔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불안해하며 먹을 것만 좋아하던 아이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눈을 못 맞추던 아이가 눈을 맞췄고, 나와서 인사도 안하던 아이가 인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요일 전에 소년원에서 전화가 오면 가슴이 철렁합니다. 안에서 말썽이 생겨 면회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슴이 철렁합니다. ‘많이 다치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앞섭니다. 안에서 징계를 받고 징벌방에 갇히면, 내가 징벌을 받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우울하고 답답해집니다. 언제 풀릴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제 의젓합니다. 감기에 걸렸다고 하니까 2주후에 와도 된다고 합니다.

멘토링한 지 일 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다른 소년원에서 말썽이 있어 추가형량을 받고 왔던 터라 안에서도 특별관리를 하던 상태였습니다. 본인도 만기출소 할 수 있을지 불안해했습니다. 이제 제주에 돌아가면 딱 한번 멘토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면 그 아이가 1년 3개월만에 만기 출소합니다. 허전합니다. 왜 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야 바로기제 새바라야 사바하!”

혼신을 다하여 염불을 합니다. 그리고 마음속 원을 세웁니다. 부처님그 아이가 사회에 잘 적응하도록 해주세요. 부처님, 그 아이가 부처님의 제자로 변화될 수 있도록 해주세요. 부처님, 제가 신심을 더하여 부처님 법을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상단에 계시는 부처님이 미소 지으시며 고개를 끄덕이십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두 번째 팔관재계를 마치고 몸은 피곤했지만 감사의 마음이 넘쳤습니다. 매년 함께 동행해준 딸아이도 고맙고, 옆자리를 비워준 보살도 고맙고, 계란 한 개를 살짝 쥐어준 보살도 고마웠습니다. 함께 참석한 전국의 포교사들이 훌륭해 보였습니다. 이제 포교사 2년차, 참으로 미흡한 상태이지만 신심을 내어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내가 살아있음이 참으로 행복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을 선입견없이 바라보고 사랑하고 싶습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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