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만덕산 백련사 (1)
상태바
강진 만덕산 백련사 (1)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09.21 11: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영종선생과 함께 가는 사찰순례 (48)
만덕산으로 둘러 싸인 백련사 대웅전

제주에서 가장 가까운 육지는 전라도 해안이다. 그런 이유로 과거에 제주도는 행정구역이 전라남도에 속했었다. 요즘은 배편이 좋아서 서너 시간이면 전라남도의 완도, 우수영, 고흥 등지로 갈 수 있다. 1박 2일이면 인근에 있는 몇 곳의 사찰을 보고, 정갈한 남도 음식을 맛보고 올 수 있다. 물론 각 사찰 인근의 풍광을 고려해 계절을 맞추면 더욱 즐거운 답사가 될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장보고의 근거지였던 청해진이 있는 완도나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배로 왜군을 물리친 울돌목이 있는 우수영에서 약 50㎞ 정도 거리에 유서 깊은 사찰이 하나 있다. 바로 강진군 만덕산에 있는 백련사다. 티끝 하나 없이 하얀 연꽃을 의미하는 백련사(白蓮寺)라는 이름을 지닌 절은 여러 지역에 많다. 그 중 강진에 있는 백련사가 가장 역사가 깊고 고승들을 많이 배출한 사찰이다. 백련사를 뒤로 감싸고 있는 만덕산은 어떤 위압감도 없는 편안한 느낌을 주는 409m의 아담한 산이다. 그 안에 자리 잡은 백련사는 창건 당시에는 산 이름을 따라 만덕사라고 불렸다.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이다. 통일신라시대 문성왕 1년(839)에 무염선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나 확인할 수는 없다. 백련사가 대찰로 알려지게 된 것은 고려 중기 무신지배기에 요세(了世, 1163~1245) 스님이 천태종 사찰로 중창하면서부터이다.

요세 스님은 경상도 합천 출신으로 속성은 서씨이다. 12세에 합천에 있던 천락사로 출가하여 균정(均定) 스님으로부터 천태학을 배웠다. 이후 열심히 정진하여 대각국사 의천이 창시한 고려 천태종을 널리 알린 스님이다. 특히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 스님을 만나 함께 지내며 지눌 스님이 만든 정혜결사에서 조계선을 닦았다고 한다. 이 두 분 스님이 상았던 고려 중기는 무신란으로 왕권이 약화되고 계속되는 무신들 간의 권력쟁탈전, 연이은 농민과 천민들의 반란 그리고 몽고의 침입으로까지 이어지는 혼란기였다. 이 시기 불교계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바로 불교의 주류가 교학 중심의 교종에서 참선 중심의 선종으로 바뀌고, 지방에서 신앙단체로서 결사가 유행한 것이다. 결사운동은 수도 개경 중심의 귀족불교에 반발하여 불자 각자의 각성과 실천을 요구하는 운동이다. 이러한 신앙결사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선종에서는 수선사(修禪社), 천태종에서는 법화 신앙에 바탕을 둔 백련사(白蓮社)다. 수선사는 지눌에 의해, 백련사는 요세에 의해 제창되었다. 이 두 결사가 양립하며 고려 후기 불교계를 이끌었다. 지눌이 주창한 수선사(처음에는 정혜사라 불리다 왕명으로 수선사라 바꿈)의 결사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의 불교계를 보면 아침 저녁으로 행하는 일들이 비록 부처의 법에 의지하였다고 하나 자신을 내세우고 이익을 구하는 데 열중하며 세속의 일에 골몰한다. 도덕을 닦지 않고 옷과 밥만 허비하니 비록 출가하였다고 하나 무슨 덕이 있겠는가.

하루는 같이 공부하는 사람 10여 인과 함께 약속하였다. 마땅히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산림에 은둔하여 같은 모임을 맺자. 항상 선을 익히고 지혜를 고르는 데 힘쓰고, 예불하고 경전을 읽으며 힘들여 일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각자 맡은 바 임무에 따라 경영한다. 인연에 따라 성품을 수양하고, 평생을 호방하게 고귀한 이들의 드높은 행동을 좇아 따른다면 어찌 통쾌하지 않겠는가.

-정혜결사문

 

이 결사문 내용 중 ‘항상 선을 익히고 지혜를 고르는 데 힘쓰고’라는 것은 곧 선정(참선)과 지혜를 쌓자는 뜻이다. 이를 줄여 ‘정혜(定慧)’라고 해서 정혜결사문이라 불린다. 즉 스님도 더욱 정진하고 울력도 하며 자신의 임무를 다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지눌 스님과 함께 지냈던 요세 스님은 지눌 스님이 활동 지역을 송광사로 옮긴 후에 천태종을 중흥해야 할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월출산에 있는 약사란야에서 정진한다. 그 때 강진 지역의 세력가였던 최표, 최홍 등이 강진으로 오길 권하자 만덕산에 자리잡고 1211년 제자 원영 스님이 절을 짓기 시작하여 1216년에 완성한다. 요세 스님은 1232년에 백련사 수행결사를 만들었는데 지눌 스님의 수선결사 못지않게 성황을 이뤘다고 한다. 수선결사가 정혜쌍수, 돈오점수를 수행의 요체로 삼은 반면 요세스님의 백련결사는 법화 사상을 토대로 한 참회하여 죄를 멸하는 참회명죄와 정토에서 태어날 것을 바라는 정토구생에 전념하였다. 수선결사와 달리 염불선을 방편으로 삼았다. 왜냐하면 수선결사는 대상이 어느 정도 근기가 있는 사람인데 반해 백련결사는 자신의 힘으로는 해탈할 수 없는 대중들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이다.

요세 스님은 지눌 스님이 50대 초반에 돌아가신 것에 비해 83세까지 사셨으니 당시로는 산당히 장수하였다. 돌아가신 이후 고려조정에서는 스님을 국사로 책봉했다. 요세 스님 이후 백련사에서는 7명의 국사가 더 배출되었으니 승보사찰 송광사 못지 않은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백련사는 바닷가에 인접해 있어서 왜구의 잦은 침입의 영향을 받았다. 사찰 건물은 여러 차례 불탔고 현재의 건물은 모두 조선시대 후기 이후에 지어진 것들이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배낭에 공부할 책을 잔뜩 넣고 천왕사에서 머문 적이 있다. 집으로 돌아갈 차비도 받지 않고 어머니께 한 달 후에 데리러 오시라고 한 후 또래 스님과 함께 승방에서 생활했다. 아침 예불시간에 깨우지는 않았지만 여섯 시쯤 되면 스님이 와서 깨우곤 했다. 깨어서 가면 인근 텃밭에서 큰 스님과 여러 스님들과 함께 울력을 했다. 한 시간쯤 일하고 나면 잠도 확 달아나고 조반도 맛있었지만 일을 해보지 않았던 나로서는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공부하기에 좋은 환경이었는데 친구도 없고 너무 조용한 환경이 갑갑했었다. 결국 절에서 재를 지낸 후 나눠 준 수고비로 차비로 해서 1주일만에 하산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하산하게 된 이유가 울력 때문인지 외로워서인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예불과 참선하고 울력까지 하는 스님들의 생활이 쉽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백련사에서 요세 스님이 당시 귀족 불교를 비판하며 스님도 참회와 참선은 물론 노동까지 해야한다고 소리치던 모습을 되새겨보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