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등축제 대규모는 아니지만 성공한 축제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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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등축제 대규모는 아니지만 성공한 축제다. 왜?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10.12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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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 행사로만 여기던 연등회의 새로운 모습 8월 11~13일 개최된 제1회 제주등축제가 그것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연등회의 역사문화자원을 활용한 제주등축제가 산지천 일대에서 개최되어 신선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

 

지자체별로 체류형 관광객 확보와 시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야간문화관광콘텐츠에 관심도가 높아지고 있다. 또한 역사문화자원을 활용한 전통문화관광콘텐츠 개발에 대한 논의가 깊어지고 있다. 제주도에서도 야간문화관광콘텐츠 개발을 위해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제주야간관광 활성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들이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지자체의 지원이나 각 단체에서 자발적으로 제주 야간문화관광콘텐츠를 개발하여 활용하고 있다. 제주 자연을 활용한 야경 오름 트레킹, 제주 별보기, 밤코냉이를 비롯해서 홀로그램 영상을 이용해 가상현실을 보여주는 ‘포레스트 판타지아’, 선운정사 ‘빛마루축제’ 등이 그러한 예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새롭게 만들어진 야간문화콘텐츠들이다.

그럼 제주의 전통문화 가운데는 야간문화관광콘텐츠는 없었을까? 그 해답이 바로 연등회(燃燈會)에 있다. 연등회에는 다양한 세시풍속은 물론이고 야간에 등을 들고 다니는 연등행렬과 등을 내어 걸어 전시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한동안 불교계의 행사로만 치부되어 자치도와 일반 제주도민들의 무관심속에 있었던 연등회가 새롭게 모습을 나타냈다. 지난 8월 11일~13일까지 제주 산지천 탐라광장 일대에서 개최된 제1회 제주등축제가 그것이다.

처음으로 개최된 제주등축제의 의의를 역사성과 장소성, 개최시기에 대한 것을 짚어보고,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 간략한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제주 연등회의 역사성부터 살펴보겠다. 제주 연등회의 역사성은 깊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시대 전국 방방곡곡에서 연등회가 설행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음력 2월 영등굿이 설행되었으며, 사찰에서는 영등굿을 받아들여 용왕재를 열었다. 조선시대의 기록들은 최부의 「탐라시 삼십오절」, 󰡔신증동국여지승람󰡕, 김상헌의 󰡔남사록󰡕, 이원진의 󰡔탐라지󰡕, 이증의 󰡔남사일록󰡕, 이형상의 󰡔남환박물󰡕, 홍석모의 󰡔동국세시기󰡕 등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이들 기록들은 15세기 후반, 16세기 중반, 17세기 초반・중반・후반, 18세기 초반 그리고 19세기 중반의 기록들이다. 이외에도 20세기에 들어 만들어진 기록으로 김석익의 󰡔심재집󰡕(1937년), 남만리의 󰡔탐라지󰡕(1902년 경), 담수계의 󰡔증보탐라지󰡕(1953) 등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그 중 최부의 「탐라시」 35절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세월은 헛되이 버려지기 싫어 嫌將歲月虛抛擲

줄다리기와 그네뛰기는 예부터 전해오고 照里鞦韆傳自昔

절에는 향불이 끊이지 않고 피어오르고 僧刹了無香火時

연등 저녁이면 퉁소와 북 소리도 패를 지어 가득하네. 騈闐簫鼓燃燈夕

 

이 시는 성종 18년(1487) 최부가 본 제주의 연등 풍속을 그리고 있다. 이보다 앞선 성종 9년(1478)의 초파일 연등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흥청거리는 육지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육지와 마찬가지로 제주에서도 줄다리기와 그네뛰기의 민속놀이와 연등날 저녁 절을 찾는 사람들로 향불이 끊이지 않고 피어오르고 퉁소와 북을 치며 즐기는 사람들이 가득하였음을 묘사하고 있다. 제주도에서 연등회는 향불이 끊이지 않고 피어오르듯이 끊임없이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장소성(placeness)이다. 왜 사찰이 아니고 산지천인가 하는 문제이다. 연등회는 사찰에서만 행해져 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위의 최부의 시에서도 보이듯이, 연등 저녁이면 사찰만이 아니라 곳곳에서 퉁소와 북을 치며 놀았다. 연등은 사찰에 다는 것과 각각 집에 다는 등, 거리등 등 다양했다. 제주의 기록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의 있었다는 기록이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육지에서처럼 다양한 등이 가정에서, 길거리에서, 절에서 달렸을 것이다. 또한 연등을 들고 다니는 행렬들도 이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연등은 제주 곳곳에서 이루어졌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번 등축제의 장소도 제주 산지천 탐라광장 일대에서 펼쳐졌다. 산지천은 제주 원도심 속에 위치하여 동문시장을 관통하는 곳으로 서울의 청계천에 비유된다고 한다. 복개되었던 것을 모두 걷어내고 다시 하천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문화광장으로 조성하고 있다. 야간 분수쇼가 일품으로 꼽히고 있던 곳이다. 이곳은 현대의 복개와 공개를 통해 거듭난 곳으로, 새로운 현대 제주의 문화적 창출로서 연등회의 장소로서 어색할 것이 없다. 제주불교신문에 따르면, 오히려 500억원을 들여 조성한 탐라문화광장의 활용도를 고심하고 있던 제주도의 문제를 일소하고 어둠의 거리를 제주다음으로 환골탈태하게 만들었다고 할 정도이다. 다만 제주 곳곳에서 열렸던 연등회처럼 제주도에서의 전통문화관광콘텐츠로서 등축전을 적극 지원하여, 최소 관광객들이 많은 몇 곳에서 동시에 개최하기를 바란다.

 

다음은 개최시기이다. ‘왠 8월 한여름의 등축제?’라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다.

연등회는 처음 문헌에 등장한 신라시대 이래로 지금까지 크게 3차례의 변화 시기를 거쳤다. 정월(1월) 보름과 2월 보름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4월 8일(초파일)이 그것이다. 공존한 시기도 있었다. 현재 널리 알려진 4월 초파일 연등회는 고려 의종 20년(1166)에 백선연이 설행하였다는 고려사의 기록이 가장 이른 것으로 밝혀져 있다.

주최측인 제주불교신문에 따르면, “폭염에 밤마다 열대야가 나타나면서 이를 피해 산지천과 탐라문화광장 주변이 도민과 관광객들의 휴식처로 각광”받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8월은 우리나라 여름 휴가 성수기로서 제주를 찾는 관광객이 가장 많은 시기이다.

그렇다. 문화는 생물이라고 한다. 시대와 역사, 그 속에 살아숨쉬는 민중들의 삶의 필요에 의해 변화를 거듭한다. 제주에서 도민과 관광객의 휴식과 야간문화관광콘텐츠로서 필요성에 의해 8월의 연등회가 개최되었다는 것이다. 연등회가 3번의 변화 시기를 겪었듯이, 현대 야간문화관광콘텐츠로서의 재탄생을 위한 지역별 또다른 시기의 창출은 시대적인 흐름으로 볼 수 있다.

 

넷째는 지역민의 자발적 참여를 통한 축전의 지역화이다. 이번 등축제의 주최는 제주불교신문사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제주불교연합회를 비롯하여 제주민예총, 한마음선원 제주지원, 약천사, 불탑사, 오등선원, 서귀포승가연합회 등에 소속된 이들이 등 만들기를 배우고 익혀, 직접 등을 만들고 전시회에 참석하였다는 점이다. 외부의 유명인 불러오기가 아니라 규모는 비록 그리 크지 않았지만 자체적으로 등축제를 준비에서부터 실행하고 즐겼다는 점에서 주목을 할 만하다. 앞으로 이런 점은 더욱 확대될 수 있도록 뒷받침 되어야 할 것이다. 지역축전에서 지역민이 밀려나고 객체화되는 축전은 줄어들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는 여타의 축전을 보자면, 이번 제주 등축제는 비록 대규모는 아니었지만 성공한 축제라고 할 수 있다.

 

제1회 제주등축제 ‘빛으로 제주문화를 투영하다’는 이미 “절집 축제를 넘어서 제주의 전통등을 향유하며, 도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엮는 마음 축제의 장으로 승화”하였다. 시설이나 행사 규모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제주의 오랜 역사적 전통문화유산을 오늘날에 맞게 되살리려고 노력했다는 점으로도 크게 찬사를 받을 만 하다. 앞으로도 지역민들이 중심이 되고 주축이 되어 자발적 참여를 통해 신명을 이루는 축전으로 이어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럼에도 전통문화를 기반으로 한 야간관광콘텐츠의 확산을 위해서는 축전의 개최시기와 기간, 장소 등 전통문화축전콘텐츠에 대한 다양한 전문적인 고민이 이루어져서 2회, 3회 … 지속될 수 있기를 바란다. 지속적인 축전의 개최로 제주만의 색다른 야간문화관광 인프라 구축과 지역경제발전을 꾀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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