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모순에 찬 이성을 비판하고 그것마저도 초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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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모순에 찬 이성을 비판하고 그것마저도 초월한…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10.16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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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에 끄달리면 인간 주체성 상실돼 인간을 초월한 무한의 절대경지 찾아야

 

절대모순에 찬 이성을 비판하고 절대모순의 이성마저도 초월한 차원에

우리는 과학시대를 살고 있다. 과학만능이라고는 하지만 정작 우리가 얼마나 깊숙이 과학에 의존하여 살고 있는지를 안다면 퍽 놀랄 것이다. 우리 생활은 이미 과학주의에 몰입되어 있다.

과학은 대상영역에 따라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과학을 일컬을 때에는 자연과학을 말한다.

기존 종교의 모순점을 배척하면서 서양에서 대두된 과학은 본래의 취지대로 인간에게 많은 기여를 했다. 하지만 과학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과학 만능주의가 팽배하여 인간의 정신적인 면을 경시하거나 등한시함은 오늘날 큰 병폐로 지적되고 있다.

기계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사람이 잠시도 기계 옆을 떠날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마치 기계의 부속품과 같이 되어 버렸다. 사람이 기계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기계가 사람을 부리고 있다고까지 말하게 되었다.

또 현대는 사람을 죽이고도 별로 죄악감을 느끼지 못하는 시대다. 바로 물질주의, 기계주의에 사로잡힌 사고방식 때문이다. 과학이 일어나기 전의 시대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종교가 국가와 사회, 대중을 지배하며 정치 및 문화를 포용해왔다.

예를 들어 인도에는 신분에 따라 사람을 네 계급으로 분류한 사성계급이 있는데, 그중 종교자가 가장 상층계급으로서 사회를 지배한다. 우리나라를 보더라도 고대 삼국시대에 불교가 국가와 민족을 교화하는 위치에서 역사를 이끌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서도 종교가 역사를 이끌어 온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과학문명이 일어나면서부터 종교는 인류의 생활 전반에서 밀려나 무력해졌다. 이제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 바탕에서 내면을 추구하고 해결하는 종교가 아니라 과학 자체와 과학에 상응하는 정치나 경제라고 할 수 있다.

정치란 첫째 국가의 주권자가 국가권력을 행사하여 영토와 국민을 다스리는 것이며, 둘째 사회집단이 권력을 매개로 하여 사회의 의사를 집약하면서 사회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또 경제는 인간의 공동생활의 기초를 이루는 물질적인 재화의 생산 분배 소비 유통 과정과 그것을 통하여 형성되는 사람과 사람간의 사회관계의 총체다.

그러나 오늘날의 정치는 인간을 지배하는 기술로 전락했으며, 경제는 물질적인 풍요를 구가하는 욕망의 표현수단이 되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본래의 그 뜻을 왜곡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와 경제에 의해 지배되는 현실을 어찌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시대라고 할 수 있을까.

욕망이란 인간의 외면에 불과할 뿐이다. 인간을 초월한 근본의 영성자리, 무한의 절대경지, 인간의 근본생명체가 분명히 현존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도외시하고 있는 과학문명은 욕망대로만 사는 시대를 만들고 있다. 삶의 욕망에 끄달리면 인간이 주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인간 생명체의 빈껍데기인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자기의 근본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위기를 맞이하여 위대한 인류의 역사를 창조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해결해야 할 중대한 과제가 아닐까. 동서고금의 인류 역사를 살펴볼 때 훌륭하고 위대한 역사는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원리가 인간의 근본바탕에서 여법하게 우러나올 때 비로소 탄생된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인류는 오늘의 이 시점까지 살아온 만큼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는 개개인의 작은 소망들이 어우러져 곧 인류의 평화와 행복으로 확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늘 주장하는 바이지만 어떠한 원리가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뒷받침해 줄 수 있을까?

서양에서 이룩한 과학의 공적은 참으로 위대하다. 그러나 그 공적을 이룩한 과학자들의 말에 우리는 잠시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서양의 지식을 인간의 외면 세계를 광대하게 이룩했지 내면세계를 등한시한 결과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인간의 근본실상을 해결했으니 서양은 이제 동양을 연구하고 배워야 한다.”

동양의 정신을 높이 평가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한국의 지도자들은 동양정신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세계의 추세를 외면하는 것인지, 아니면 서양문명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인지 세계의 석학과 예술가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한국의 고유문화와 철학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서양에서 희구하는 동양정신은 곧 불법이다. 한국은 고대 삼국이후 불교를 받아들이면서부터 이 땅의 곳곳에 불타정신을 심어왔다. 그러나 아무리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더라도 전통을 잘 지키지 못했을 때 훌륭한 역사 창조는 있을 수 없다.

세계의 학자들은 한국이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문화재를 가지고 있으며, 훌륭한 민족으로ㅓ 과거에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음에도 전통을 잘 지키지 못하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가까운 이웃인 중국이나 일본, 인도가 그들의 고유문화와 전통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음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의 전통문화 유실문제는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되는 바다.

그렇다고 전통만을 내세우고 고집해야 된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우리의 고유문화를 맹목적으로 수용할 것이 아니라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훌륭한 점은 더욱 계승, 발전시켜서 위대한 역사 창조의 밑거름이 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요사이 한국에는 국가의 안녕을 도모하려는 정치의 장이 활발한 기운을 띠고 있다. 그러나 어느 나라도 정치나 외교 현실이 완벽할 수는 없다. 우리 정치인들은 서로 과거의 잘못을 관용정신으로 용서하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국가와 국민에게 봉사할 각오를 다짐하여 화합을 이룩해야 한다.

또 미래를 건설함에 있어서도 올바른 용기로 새 역사를 점진적으로 창조하는 것이 정치인의 무리 없는 옳은 자세라고 생각한다. 로마가 위대한 것은 서로 관용적이고, 도덕적 용기로 어려운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했기 때문이라고 처칠은 말했다. 이제 곧 21세기가 될 것이다.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다행히 한국에는 전통으로 내려오는 불교가 있지 않은가! 불법이야말로 인간을 비판해서 인간을 초월하고, 과학을 비판해서 과학을 초월할 수 있다.

불교는 합리적인 종교다. 혹자는 불교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비합리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최고의 이성으로 첨단과학을 연구하는 현대 과학자들도 불교가 매우 합리적인 교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불교는 또 비합리적인 종교이기도 하다. 그러나 합리적이지 않아서 비합리적이라는 게 아니라 절대모순에 찬 이성을 비판하고 절대모순의 이성마저도 초월한 차원에 있기 때문에 비합리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차원 높은 그 자리에서 다시 비판하여 구경의 그 자리, 참다운 그 자리를 명확히 해결한 것이 불법이다. 그 자리에서 보면 이성 그것도 환같고 영같다. 그러므로 이성을 초월하고, 비합리적이다. 그러한 바탕에서 과학을 비판하고 초월하며 참으로 모든 것을 초월하여 모든 것의 주인이 될 때 우주는 평등하며 한 생명체로서 역사 창조의 주체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우리 민족 전통의 불법, 이 훌륭한 것이 결코 스님들의 전유물일 수만은 없다. 불법수호를 불교종단이나 스님에게만 맡길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자기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민족적으로 주체성을 지각해서 인류의 새 역사 창조에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참다운 실존의 말로 글을 맺겠다.

 

부처를 죽이고 신을 죽여서 자취가 끊어지니

무쇠의 용과 옥의 코끼리가 하늘에 사무쳐 날도다.

나무사람은 구멍 없는 피리를 불고

돌계집은 줄없는 거문고를 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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