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카파 대사의 <삼종요도(三種要道)>에 대한 달라이라마 법문[上]
상태바
총카파 대사의 <삼종요도(三種要道)>에 대한 달라이라마 법문[上]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10.25 1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출리심.보리심.공성에 대한 정견이 모든 장애 제거

부처님의 가르침은 과거의 진리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행복의 가르침이다. 기복신앙과 형식화된 불교를 넘어 삶의 지혜와 미래의 희망을 발견하는 불교의 깊은 사유와 실천적 운동성을 공론화하기 위하여 제주불교신문에서는 세계적 불교의 수행자와 불교학자들의 뛰어난 법문을 가려 싣는다.-편집자주

 

 

 

총카파(1357~1419)대사는 동부 티베트 암도 지방의 
총카(Tsongkha)에서 태어났다. 16세에 본격적인 
수학의 길에 올라 끊임없이 뛰어난 스승을 찾아다니면서
공부하고 수행하였다. 비구계를 받은 후 중관(中觀)과 
구사론俱舍論=아비담마)의 사상들을 공부하였으며 
밀승(탄트라)에 대한 수행을 병행하였다. 철학적으로 
총카파는 귀류논증중관학파의 가르침을 따랐고, 
엄격한 승가의 계율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겔룩파는 엄격한 승가 위계질서와 계율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모든 중생은 깨닫고자 하는 마음인 보리심이라는 특별한 동기를 세워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당신의 순수한 보리심을 동기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 모든 성취와 공덕은 깨달으려는 마음인 보리심에 의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이 마음을 기르고 개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한 집착과 번뇌 망상으로부터 떠나는 마음인 출리심(出離心)은 윤회에 대한 모든 욕망에서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전환하는 것을 말합니다. 해탈의 길은 바로 이 출리심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또, 보리심은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해 깨달으려는 자세 또는 의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공성(空性)에 대한 정견(定見)은 존재의 실제 본성을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존재의 무자성(無自性)에 대한 개념인 공성을 바르게 이해하는 눈입니다. 정견은 출리심에 의해서 생기며, 출리심이 생기면 해탈의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해탈을 가로 막고 있는 장애를 제거하는 방법입니다. 여기서 장애란 주로 윤회에 집착하는 번뇌 망상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공성에 대한 바른 눈인 정견에서 보리심에서 생깁니다. 이 보리심도 역시 완전한 깨달음인 일체지(一切智)를 가로 막는 장애를 제거해줍니다. 이러한 장애들은 주로 존재를 실재하는 것으로 잘못 파악하는 견해들을 말합니다. 깨달음은 이러한 장애들을 제거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소승의 가르침에서는 자신들의 목표인 해탈을 이루기 위해 출리심과 공성에 대한 정견을 수행합니다. 대승은 여기에 보리심을 더 수행하여 모든 장애를 완전히 제거합니다. 따라서  <삼종요도>  즉, 세 가지 중요한 길인 출리심과 보리심 그리고 공성은 소승과 대승의 모든 가르침의 핵심이며 정수입니다. 
밀법(密法, Tantra) 수행에서의 미세신(微細身), 풍기(風氣), 기맥(氣脈), 명점(明点) 등도 결국 출리심과 강력한 보리심, 그리고 용수(龍樹) 보살과 당신의 두 제자(聖天과 佛護)께서 가르치신 공성에 대한 바른 이해, 이 세 가지 길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더불어, 우리는 미세한 마음과 의식을 성취할 수 있는 잠재력에 대한 자존심과 위엄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런 수행을 통하여 우리는 부처님의 지혜법신(智慧法身)과 색신(色身)의 고귀함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실제 이러한 몸을 수행 중에 바로 가질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깨달음을 이루려는 강력한 동기인 보리심을 바탕으로, 부처님의 지혜법신과 색신의 고귀함을 유지하는 수행을 통하여, 점차로 완전함을 성취해 나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 가지의 중요한 길은 모든 현교와 밀교의 기본 바탕입니다. 어떤 경우에든, 항상 지혜에 의지해야 하며, 남들을 돕고 공덕을 쌓는 방편이 지혜와 결합되도록 함께 수행해야 합니다. 
총카파 대사의 <삼종요도>는 아주 짧은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는 바른 동기를 심어야 합니다. 자신의 동기를 친절한 마음에 둔다면 이것은 행복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부족하고 대신 자만과 오만 등이 가득하다면 불행과 어려움만 따를 것입니다. 미래 생의 결과는 착하든 거칠든 또는 친절하든 무례하든, 자신이 지금 이 생에 하고 있는 행동방식에서 미리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설령 미래의 생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금 가지고 있는 친절한 마음이나 거친 마음은 이 생에서 바로 행복과 불행이라는 결과로 돌아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행동입니다. 미래의 생이 없어도 친절한 사람은 해로움이 없습니다. 친절한 마음은 일상을 편안하게 도와줍니다. 또 미래 생이 있다면 지금 친절한 사람은 그때도 모든 이들에게 이익을 줄 것입니다. 그러니 친절하십시오. 서로에게 친절하게 대하십시오. 매일 매일 만나는 실제 상황에서 실제 사람에게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법(法)의 핵심입니다.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사는 것처럼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씩 실천해 나가야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총카파 대사는 티벳의 암도 지방에서 태어나서 위짱(U-Tsang)에 있는 중앙 티벳으로 여러 스승들께 공부하기 위해 갔습니다. 거기서 현교와 밀교를 모두 공부하고, 마침내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총카파 대사의 <삼종요도>에서는 출리심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고귀한 인간의 몸을 받은 것과 무상(無常)을 기억하여 이 생의 번뇌 망상을 떠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윤회의 고통을 기억하여 다음 생의 번뇌 망상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즉, 귀의에 대한 강조를 조금 덜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보리도차제론>에서는 세 가지의 동기에 대한 논의를 담고 있습니다. 즉, 입문자의 단계에서부터 근기가 뛰어난 단계까지, 먼저 다음 생에 대한 관심을 가질 것을 강조하며, 같은 맥락에서 귀의에 대한 가르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승리자께서 가르치신 모든 핵심적인 의미는 
수승한 승리자의 아들, 보살들께서 찬탄하신 길, 
상서로운 해탈을 원하는 이들을 위한 이 길을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하여 제가 해설하려 하옵니다. 

“승리자[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모든 핵심적인 의미”는 출리심을 말하며,“수승한 승리자의 아들‘보살’들께서 찬탄(讚嘆)하신 길”또는 보살의 길은 보리심을 말합니다.“상서로운 해탈을 원하는 이들을 위한 길”은 우리를 해탈의 길로 인도하는 공성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누구든 윤회의 안락에 탐착하지 않고 
가만(暇滿)의 의미를 다하기 위해 정진하는 이는 
오직 승리자를 기쁘게 하는 길에만 마음을 쏟는 
상서로운 이들 뜻에 맑은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라. 

이 게송은 주의 깊게 잘 들으라는 권고입니다. 즉, 어떤 동기를 가지고 가르침을 들어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승리자 부처님을 기쁘게 하는 길”은 어떠한 잘못도 없는 완전한 길입니다.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완전한 길을 가는 것이 바로 부처를 기쁘게 하는 길입니다. 
실제 본문은 출리심과 보리심 그리고 공성의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이해의 점차적인 단계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윤회의 안락을 벗어나려는 강한 출리심에서 다른 이들을 위한 자비심이 강화됩니다. 출리심은 두 가지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윤회의 고통을 아래로 훑어보고 나서, 윤회에 관심을 잃고 혐오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자유로운 해탈의 경지를 위로 살펴보고 그것을 성취하기 바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자세를 강화하면 보리심은 더 강해질 것입니다. 보리심 역시 마찬가지로 위아래로 살펴보는 두 가지 방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 이 출리심과 보리심을 기반으로 하여 공성에 대한 바른 견해인 정견을 얻게 되면, 해탈 또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정견에는 사성제(四聖諦)에서 구분한 두 가지의 진리인 이제(二諦)가 있습니다. 귀의의 근본 대상인 부처님은 사성제의 법을 설하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완전무결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이해하고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리심과 함께 공성에 대한 바른 이해는 우리를 완전한 지혜인 일체지(一切智)로 이끌어 줍니다. 또, 바른 출리심이 생겨야 해탈의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먼저 출리심에 대해 논의하고 있습니다. 

청정한 출리심이 없이는, 윤회 바다의 
안락한 과보에 이끌리나니, 끊을 방법이 없으며, 
윤회를 탐닉하는 몸 가진 이들은 결국 
모든 것에 속박 당하나니, 먼저 출리심을 구하라. 

첫 구절에“청정한 출리심”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윤회의 안락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버렸다는 의미로 아주 청정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청정한 출리심이 부족하면, 세속적인 관심에 자꾸만 사로잡히게 되어 해탈을 성취할 수 있는 길과는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선한 업을 쌓았는가에 상관없이, 욕망과 집착이 함께한다면 윤회의 사슬은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므로 출리심을 개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출리심은 어떻게 개발하는 것입니까? 

얻기 힘든 가만(暇滿)을 얻은 생을 낭비하지 말고 
마음과 친숙하여 이 생의 부귀영화와 바꾸라. 
업보(業報)를 피하지 못하는 윤회의 고통을 
다시금 생각하여 앞날의 부귀영화와 바꾸라. 

고귀한 인간 몸 받은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우리는 여덟 가지 한가한 자유로움인 팔유가(八有暇)와 열 가지의 온전함인 십원만(十圓滿)인 가만(暇滿)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몸은 무상하며, 죽음이 찾아오면 곧 잃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얼마나 어려운 기회를 얻은 것인지 깨닫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생에 집착하는 관심을 돌려야 합니다. 
하지만 죽음과 무아에 대해 수행 할 때도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즉, 죽음은 확실하다는 것,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 등입니다. 죽음은 어떤 순간에도 찾아 올 수 있습니다. 법에 대한 가르침을 제외하고, 어떤 것도 죽음의 순간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다가오고 있는 죽음과 미래의 생을 위하여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면, 죽음이 임박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죽음에 대하여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 생에만 집착하는 것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인과법(因果法)의 완전무결함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인과(因果)의 법칙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단순하게 생각해서 선은 선을 낳고, 악은 악을 낳습니다. 업은 확실히 존재합니다. 선한 행동은 확실히 행복한 결과를 낳고, 악한 행동은 다소 빠르고 늦는 차이는 있지만 분명 고통의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자기의식의 흐름(自相續) 속에 고통의 원인을 심는다면, 어떻게 마음 놓고 쉴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시한폭탄과 같습니다. 언제 터지는가는 시간문제입니다. 이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끝내 평화는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원인과 결과에 대해 주의 깊게 생각함으로써, 우리는 좀 더 강력하게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려는 서원(誓願)을 세울 수 있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