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카파 대사의 <삼종요도(三種要道)>에 대한 달라이라마 법문[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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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카파 대사의 <삼종요도(三種要道)>에 대한 달라이라마 법문[下]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11.01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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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집의 철망에서 벗어나야 존재의 본성을 본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과거의 진리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행복의 가르침이다. 기복신앙과 형식화된 불교를 넘어 삶의 지혜와 미래의 희망을 발견하는 불교의 깊은 사유와 실천적 운동성을 공론화하기 위하여 제주불교신문에서는 세계적 불교수행자와 불교학자들의 뛰어난 법문을 가려 싣는다. -편집자주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간에 자신의 생로병사를 경험합니다. 약이 아무리 많아도 늙음을 치료할 수 없으며, 지속적으로 생겨나는 모든 병을 다 치료할 수 없습니다. 생로병사의 고통은 그것이 생기는 원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몸이 바로 생로병사의 원인입니다. 이 몸은 여러 가지가 모여서 이루어졌고, 번뇌 망상과 업이 쌓여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고통은 언제나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몸에는 부딪치고 반발하는 힘이 모여 있습니다. 즉, 몸에는 냉기(冷氣)와 열기(熱氣)가 돌아다닙니다. 감기에 걸려 해열제(解熱劑)를 먹으면 몸에 열이 가라앉습니다. 그러나 너무 많이 먹으면 다시 몸에는 냉기가 힘을 쓰게 됩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합니다. 오직 몸의 냉기와 열기가 잠시 균형을 이룰 때만이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상태도 계속 가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균형이 무너지고 맙니다. 
  우리는 예쁜 사람의 몸을 보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머리, 눈, 코, 심장, 피부, 폐 등 부분적으로 떨어뜨려서 생각하면 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부분들은 예쁜 것이 아닙니다. 또 소변, 대변 등 몸에서 나오는 것을 거리에서 보게 되거나 냄새를 맡게 되면, 우리는 얼굴을 돌리거나 코를 막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바로 우리가 예쁘다고 생각했던 몸에서 온 것입니다. 
  그렇게 오물을 쏟아 내는 우리의 몸이 어떻게 깨끗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몸은 부모님의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생겼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것들을 얻어서 책상위에 올려놓고 바라보면 누군가는 혐오감마저 느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기 위해 음식을 40년간 먹었다면 반대로 찌꺼기를 배설한 것도 40년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고 움직이는 이 몸이 어떻게 깨끗한 것일 수 있습니까? 따라서 이렇게 청정하지 못한 몸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이 몸은 번뇌 망상과 업으로 인하여 생긴 것입니다. 번뇌 망상과 업을 완전히 제거 한다면 다시는 이러한 거친 몸이 모여서 고통을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번뇌 망상은 잘못된 생각과 믿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즉, 존재의 본성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에 본래의 성품이 없다는 것을 바로 보게 되면, 번뇌 망상은 녹고, 공성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래서 몸은 이 무지를 보기위한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익숙해지고, 윤회의 번영(繁榮)에 
이끌리는 마음은 한 순간도 일어나지 않으며, 
온 종일 밤낮으로 해탈을 구하는 마음이 
생겨날 때, 출리심이 일어나리라. 

출리심은 또한 청정심(淸淨心)을 발휘하여 
정화(攝受)하지 않으면, 무상보리(無上菩提)의 
원만한 안락의 원인이 될 수 없나니, 
지혜로운 이들이여, 수승한 보리심을 일으키라. 

앞에서 말한 것처럼, 보리심(菩提心)이 없이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격류(激流)하는 네 개의 강(江)이 흘러 나른 
풀기 힘든 속박은 단단히 조여 오고, 
아집(我執)의 철망 안에 갇히니, 
무지의 큰 암흑에 완전히 덥혔도다. 

끝없는 윤회로 태어나고 또 태어나니, 
삼고(三苦)는 쉬지 않고 괴롭히네. 
지금 그와 같이 되신 어머니들의 
참 모습을 잘 보아, 수승한 마음을 일으키라. 

“격류(激流)하는 네 개의 강(江)이 흘러 나른”은 생로병사의 네 가지 고통을 말합니다. 어두운 업의 과보인“풀기 힘든 속박은 단단히 조여 오고” 있는데, 무지라는“아집(我執)의 철망”에 갇혀서“큰 암흑에 완전히 덥히니”존재의 바른 본성을 볼 수가 없습니다. 사람과 현상이 모두 실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을 항상 보이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변화의 흐름 속에 있습니다.‘나’는 단지 변화하는 속에‘나’라고 이름 붙인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무지로 인하여‘나’라고 파악할 뿐, 그것은 변화하는 현상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영원하고 항상 그대로 머물러 있으며 무언가 실재하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이 무지의 어둠이 우리를 업의 철망 속에 갇히게 하는 나쁜 업을 쌓는 실질적인 원인입니다. 그 결과 저절로 여기서 말하고 있는 세 가지 고통인 삼고(三苦)를 받는 것입니다. 즉 직접적인 고통인 고고(苦苦), 변화로 인한 고통인 변고(變苦), 업과 번뇌가 무르익어 행을 해야만 하는 고통인 행고(行苦)를 받습니다. 이러한 고통을 우리의 모든 어머니가 그대로 당하고 있음으로, 보리심의 바른 동기를 가지고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현상(現象)을 분별하는 지혜를 못 갖추면 
출리심과 보리심이 익어간다 하더라도, 
윤회하는 근본은 끊을 수가 없나니 
연기법(緣起法)을 이해하기 위한 방편을 구하라. 

  총카파 대사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공성은 연기법에서 생기고, 연기법은 공성의 의미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서로 의존하여 생기는 원리인 연기법에 의존하는 현상의 실상을 알고, 그 본래 성품인 공성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들을 익히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윤회열반(輪廻涅槃)의 일체법(一切法)이 
인과(因果)도 피하지 못하는 것을 보는 이가 
대상(所緣)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모두 제거하면 
부처를 기쁘게 하는 길에 들어서리라. 

  윤회와 열반의 모든 현상은 원인과 결과에서 옵니다. 이것은 오류가 없습니다. 이것을 한 번 이해하고 나면, 그때야 비로소 부처를 기쁘게 하는 길에 들어 설 수 있습니다. 공성을 한 번 이해하고 나면, 더 이상 본래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인식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무언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기반인 잘못된 인식은 사라집니다. 
현상(存在)은 연기(緣起)를 속이지 못한다는 것과 
공성(空性)이라는 것, 이 두 가지를 벗어난 이해가 
다양한 형태로 생겨남은 
여전히 종지(宗旨)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로다. 

  공성(空性)을 한 번 이해하고 나면, 손가락으로 가리켜‘이것은 이런 물건’이라고 하던 것에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절대적 진리 안에서 궁극적으로 분석하면, 어떠한 사물에서도 그 실체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물이 나타나는 것도 역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사물 역시, 세속적 진리 안에서는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부처님께서 의도하신 공성과 이제(二諦)에 대한 바른 견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흐름을 멈추지 못한다는 사실과 동시에 
연기(緣起)를 속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봄으로써 
믿고 있던 모든 이해의 방식을 깨뜨리고 나면 
그때야 정견(正見)의 분석을 마치리라.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물이 연기의 법칙으로 인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사물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발생하며, 그들의 본래 성품은 공(空)합니다. 실제로 그들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만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인과 결과에 의지하는 연기의 법칙을 확실히 이해하고 믿음으로써 사물이 본래 공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믿을 수 있습니다. 역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그와 같은 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이해하고 나면, 공성 즉, 정견에 대한 완전한 분석을 모두 마치게 됩니다. 

존재에 끝이 있다(有邊)는 관념을 벗어나고 
공(空)에 끝이 없다(無邊)는 
관념을 벗어난 공성(空性)이, 
원인과 결과로 생겨나는 이치를 알고 나면 
극단적인 견해(邊執見)에 사로잡히는 일은 없으리라. 

  우리는 종종 눈에 보이는 사물만을 가지고 사물들이 그렇게 눈에 보이는 대로 항상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견해를 만날 수 있습니다. 또 사물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공(空)하다는 극단적인 견해를 만납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서로가 서로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사물은 공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눈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공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를 떠나고 나면, 사물은 원인과 조건 또는 원인과 결과에 의지한 연기(緣起)의 법칙으로 존재하며, 그래서 그 실체가 공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물이 본래 공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연기법 때문이며, 연기법 때문에 사물이 본래 공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바르게 깨우침으로써 두 가지의 극단적인 견해를 떠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세 가지 중요한 길의 
핵심을 스스로 그와 같이 이해할 수 있을 때, 
고요한 곳을 찾아 떠나 정진의 힘을 발휘하여 
구경(究境)의 안락을 속히 성취하라, 아들이여! 

  바른 가르침을 들은 힘으로, 깊이 생각하여 그 의미를 확신할 수 있을 때 까지 분석한 다음, 출리심과 보리심과 공성에 대한 바른 견해를 얻게 되면, 스스로 고요한 곳을 찾아 선정에 헌신하여 그것을 깨우쳐야 합니다. 
  이 <삼종요도>는 아주 중요한 경전입니다. 이 안에는 모든 현교와 밀교의 핵심적인 내용이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공성에 대한 가르침은 너무 어렵습니다. 공성이나 이제(二諦) 그리고 정견(正見) 등 전문적인 불교 용어들에 익숙하지 않으면, 아주 혼란스럽습니다. 이러한 용어를 정의하고 주장하는 방법은 불교 안에서도 다양합니다. 인도 불교의 사대학파(四大學派)인 유부(有部), 경부(經部), 유식(唯識), 중관(中觀) 학파 또는 밀교의 사급요가(四級瑜伽)인 행(行), 작(作), 요가(瑜伽), 무상요가(無上瑜伽) 등에서도 각기 조금씩 다른 깊이를 가지고, 이러한 불교 전문 용어들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한 체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서 함부로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분파(分破)적인 속성을 버리고 거시적인 시각으로 하나씩 진지하게 공부해 나갈 때,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의 진수를 제대로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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