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짐 내려놓을 때 빈 마음이 평화 가져와
상태바
마음의 짐 내려놓을 때 빈 마음이 평화 가져와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11.08 13: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태국의 대선사‘아잔 차’스님의 가르침(上)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아쟌 차 스님(1918~1992)은 태국, 빠뽕사원의 주지로, 이 법문은 1977년 3월 외국인들과 제자들에게 한 설법이다. 가장 많이 알려진 이 글은 <보디냐나지(誌)>에 실렸으며,‘마음’을 주제로 한 법문으로 불자와 일반인들에게 큰 위안을 주고 있다. 
-편집자주

 

아잔 차(Ajhan Chah:1918~1991)아잔 차는 태국 북동부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20세에 비구계를 받고 기본적인 경.율.논을 공부했다. 그러나 비구가 된지 5년 뒤 부친이 중환으로 별세하자 삶의 무상을 절감하게 되었고, 경전공부만으로는 생사해탈을 할 수 없음을 깨닫고는 선원을 떠나 숲 속 두타행의 길로 들어섰다. 숲 속에서 은둔하며 두타행의 전통을 따르는 여러 스승들을 찾아가 사사한 후, 수년간 두타승으로 떠돌면서 숲이나 동굴, 화장터 등에서 용맹정진하던 중 아잔 문 선사를 참방하여 많은 깨달음과 지혜를 얻었다.아잔 차 스님은 수행함에 불굴의 용기가 있어 어떠한 장애 속에서도 결코 물러나지 않았다. 맹수들이 득실거리는 정글이나 공동묘지에서 죽음을 관하며 삶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고, 장마철 폭우에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용맹심을 이어나갔다. 때로는 몸이 아프기도 하고 갖가지 회의에 시달리며 몇날 며칠을 눈물로 지세기도 했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았고, 오직 불법을 위해 모든 것을 송두리째 내던졌다. 이 같은 강인한 정신력과 대담한 용기에 힘입어 이윽고 지혜와 활력이 생겨났고 남을 도울 수 있는 무한한 능력도 체득하게 되었다.

 

  나의 스승인 아쟌 사오 스님께서 사시던 시대는 오늘날에 비해 생활이 훨씬 단순하고 덜 복잡했습니다. 그 시절은 스님들이 해야 할 일이나 집전할 의식이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렇다 할 거처도 없이 숲속에서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선정공부에 전심전력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사치하는 법도 없었습니다. 스님들은 대나무로 물컵이나 타구(唾具)를 만들어 썼고, 신도들의 내왕도 별로 없었습니다. 수행자들은 많은 것을 원하지 않았고 또 기대하지도 않아 가진 것만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선정을 숨 쉬며 삶을 즐겼습니다.
그렇게 살아가자니 자연히 수행자들은 온갖 궁핍을 다 겪어야 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학질에 걸려 약을 구하려면 스승은“자네에게 필요한 건 약이 아니야. 공부나 계속하게.”라고 꾸짖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때는 지금처럼 약을 마음대로 구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습니다. 약이라고는 기껏해야 숲에서 자라는 약초나 풀뿌리가 고작이었습니다. 환경이 그러했기 때문에 수행자들은 극도의 참을성과 견딜 힘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웬만한 병 같은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디가 조금만 아파도 곧장 병원으로 달려가는 실정입니다!
때로 스님들은 탁발을 하기 위해 사오 킬로미터에 이르는 먼 숲속 길을 걸어야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탁발한 것이래야 보잘 것 없어서 쌀과 소금 내지는 고추 몇 개가 고작이었습니다. 반찬을 얻느냐 못 얻느냐는 아예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 때 형편은 정말 이처럼 어려웠습니다. 아무도 감히 배가 고프다느니 지쳤다느니 하고 불평할 엄두를 못 내었고, 불평하기보다 차라리 몸을 돌보는 법을 스스로 익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변에 잠복해 있는 갖가지 위험을 줄곧 참을성으로 견뎌내면서 숲속 정진을 해냈습니다. 정글 속에는 사나운 맹수가 우글거렸을 뿐 아니라 두타행 내지 숲속 거주에 따르는 육체적, 정신적 고난 또한 이루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주위 환경이 우리를 정반대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요즘 수행자들은 수행조차도 자기 자신의 의견이나 욕구에 따라서 하려 들기에 이르렀습니다. 노스님들이 옛 시절을 얘기해 주면 마치 신화나 전설을 듣는 양 합니다. 그저 무관심하게 들을 뿐 이해하려 들지 않습니다. 도무지 가슴에 가 닿지를 않는 겁니다.
옛 수행 전통대로라면 수행승은 적어도 5년은 스승과 함께 지내야 합니다. 그러면서 어떤 때는 묵언을 해야 하기도 합니다. 너무 많이 말하지 말라! 책을 읽지 말라! 그 대신 너 자신의 마음을 읽어라!
자기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참으로, 대단히 재미있습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이 마음은 그 자신의 길들지 못한 습관에 따라 이리 뛰고 저리 뜁니다. 흥분해서 마구 쏘다니는데 그것은 마음이 결코 길들여져 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마음을 길들여야 합니다. 불교의 선정은 마음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것도 자신이 자신의 마음을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고 또 중요합니다. 마음을 길들이는 일은 불교에서 제일 강조하는 요점입니다. 불교는 마음의 종교입니다. 오직 그 뿐입니다. 마음을 향상시키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은 곧 불교를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이 마음은 짐승 우리 속에 갇혀 삽니다. 게다가 그 우리 속에 갇힌 마음은 성난 호랑이와 같습니다. 만약 이 설쳐대는 마음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말썽을 일으키고 맙니다. 그 마음을 여러분은 선정(samadh)으로 길들여야 합니다. 이것을‘마음 길들이기’라 부르는 것입니다. 길들이기를 처음 시작할 때는 수행의 기반으로서 도덕적 계율부터 확립시켜야 합니다. 계율은 몸[身]과 말[口]의 길들이기입니다. 여기에서 갈등과 혼란이 발생합니다. 여러분이 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하지 않으려 애쓸 때 거기에 갈등이 생겨나게 됩니다.
적게 먹어라! 적게 자라! 말을 적게 하라! 세속의 습관이라면 무조건 줄이고, 그 힘에 거역하라. 마음이 내킨다고 해서 그대로 행하지 말고, 생각이 흐르는 대로 좇아가지 말라. 이런 노예적 추종을 그만 두라. 언제나 무명(無明)의 흐름에 거슬러 나가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계율’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계율로 마음을 길들이려 하면 마음은 대단히 불만스러워져서 투쟁을 시작합니다. 제약되고 억압당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마음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하게 되면 방황하고 투쟁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고(苦)가 선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이 고는 사성제[四聖諦] 중에 첫번째 진리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고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고도 결코 원치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바로 이 고가 우리에게 지혜를 가져다줍니다. 고통이 있을 때 우리는 그 고통을 응시하게 됩니다. 그러나 행복은 우리의 눈과 귀를 멀게 합니다. 행복은 결코 인간들로 하여금 참을성을 키우도록 놓아두지 않습니다. 편안함과 행복 때문에 우리는 부주의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더럽히는 고(苦)와 낙(樂) 두 가지 번뇌 중에서, 더 쉽게 관찰할 수 있는 것이 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를 없애버리기 위해서 바로 고를 들춰내야 합니다. 무엇이 고(苦)인지부터 먼저 알아야 우리는 그 다음에 선정 닦는 방법을 비로소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선 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마음을 길들여야 합니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무엇이 요점인지 영문을 잘 모르겠지만, 스승이 뭔가를 하라고 할 때는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참을성과 견딜성의 미덕을 키우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여러분은 그것을 참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생길만 해서 생긴 일이기 때문입니다. 삼매 수행에 들어갈 때 여러분은 평화와 평온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막상 해보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수행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못 얻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말합니다.“나는 평온을 얻을 때까지 앉아 있으리라.”하지만 평온이 생겨나지 않으면 여러분은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괴로움이 있게 되면 벌떡 일어나 달아나 버립니다. 이렇게 수행하는 것은‘마음의 계발’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포기’라 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기분을 좇는 대신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법으로 자신을 길들여야 합니다. 게으르게 하든, 부지런하게 하든 그저 계속 정진하십시오. 그 길이 훨씬 낫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다른 길, 즉 당신 기분을 좇는 길은 아무리 헤매어 봐도 결코 법에 다다르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법을 닦는다면, 그 때는 기분이야 어떻든 상관없이, 끊임없이 정진을 하게 됩니다.
이 길이 아닌 다른 길, 즉 제멋대로 공부하는 길은 부처님이 가르치신 길이 아닙니다. 수행에 대해서 또 법에 대해서 나름대로 낸 소견을 따른다면, 우리는 곧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그른지 명확히 분별하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것은 가장 느린 방법입니다. 부처님의 법에 따라 수행하는 것이 지름길입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게으를 때도 수행하고 있고 부지런할 때도 수행하고 있게 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마음이 어느 시간 어느 공간을 향하고 있는지 항상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계발’이란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견해를 따라 수행하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많은 의심을 하게 됩니다.“난 별로 소질이 없나봐. 행운도 없어. 벌써 몇 년이나 공부를 했는데도 아직 깨닫지 못했어. 난 아직 법을 보지 못했어.”스스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태도로 수행하는 것을 `마음의 계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재앙의 계발’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 여러분이 그와 같다면 즉 아직도 뭐가 뭔지를 알지 못하고 보지를 못하는 수행자라면 또 아직까지 스스로를 새롭게 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그릇되게 공부해 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아난다여, 부지런히 수행을 하라! 수행을 끊임없이 향상시켜라! 그러면 그대의 모든 의심도, 모든 불안도 사라지리라.”
의심은 생각이나 이론으로, 사변이나 토론으로 없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 해서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번뇌는 오로지 바른 수행을 통하여 마음을 향상시키는 것에 의해서만 없어집니다.
★다음 호에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