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두륜산 대흥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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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두륜산 대흥사 (1)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11.08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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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선생과 함께 가는 사찰순례 51>
소박하면서도 화려하게 장식된 대흥사 내 서산대사 부도

전라남도 해남에 있는 두륜산(頭崙山)은 소백산맥 끝자락에 자리한 높이 703m로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이다. 두륜산은 원래‘한듬’이라 불렸는데,‘한’은 넓은 신작로를 한길이라 불렀던 것처럼‘크다’는 뜻이고,‘듬(둠)’은‘둥들다’거나‘덩어리’라는 뜻을 가졌다. 말 그대로 하면 큰 (둥근)덩어리라는 뜻이다. 바닷가에 갑자기 큰 산이 솟아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여겨진다. 이후‘한듬’은 한자로‘대둔(大芚)’으로 바뀌고 그 안에 자리한 절도 대둔사로 불렀다. 대둔산은 다시 두륜산으로 이름이 바뀌는데,‘두륜(頭崙)’이란 이름은 중국 황허의 발원으로 중국인들이 신령스럽게 여기는 곤륜산(崑崙山) 줄기가 백두산(白頭山)으로 이어지고 그 줄기가 한반도 남쪽 끝까지 이어 내려왔다고 해서 백두산의‘두’자와 곤륜산의‘륜’자를 합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지명을 새로 표기할 때 두륜산의 륜자가 산이름‘崙’자에서 수레‘輪’자로 바뀌고, 대둔사도 대흥사(大興寺)로 바뀌었다. 지금은 입에 더 익숙한 대흥사로 사용하고 있다. 
해남이 한반도의 땅끝이다 보니 두륜산에는 동백나무, 왕벚나무, 후박나무 등 난대성 상록활엽수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숲과 그 사이로 난 아기자기한 계곡들이 어우러져 계절마다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하여 두륜산은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승지로 널리 알려졌다. 그 안에 자리한 대흥사는 오늘날 해남, 목포, 강진, 광주 등 9개 시군의 말사를 관할하는 대한불교 조계종 22교구의 본사이다. 
대흥사가 언제 처음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대흥사의 창건 연대에 관해서는 추사 김정희와 오랜 교유를 했고 차와 관련해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초의선사가 편집한『대둔사지』에 실린 내용을 통해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대둔사지』는 옛부터 내려오는 대둔사에 관한 기록들을 정리하였는데, 창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신라시대인 514(법흥왕 1)년에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세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통일신라시대인 875년(헌강왕 원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당나라에서 귀국한 후 나라 안에 500개의 절을 짓는 게 좋다고 상소할 때 대둔사도 포함되었다는 기록이다. 대둔사지에 수록된 내용은 대흥사와 인근인 강진 백련사에 머물며 당시 강진에 귀양와 있던 정약용과 교유한 혜장선사(惠藏禪師)가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학승이었던 혜장선사는 아도화상은 대둔사가 처음 만들어졌다는 514년보다 300년이나 이전에 활동했던 인물이며, 875년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설도 도선국사가 당나라에 다녀왔다는 기록이 없고, 875년은 도선국사가 태어난 해이기 때문에 기록에 전하는 창건 연대는 모두 근거가 없다고 보았다. 절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인 응진당 앞 삼층석탑(보물 제320호)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그 외에 오래된 것으로는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호)과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이 있는데 모두 고려시대 유물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대흥사는 통일신라시대 말기에 만들어진 절로 만들어질 때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시대에는 북미륵암이 조성되었지만 당시 절의 규모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대흥사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고 큰스님들이 배출된 것은 불교를 배척한 조선시대였다. 대흥사를 큰 사찰로 발전시키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바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고승 중 한 명인 서산대사 청허당 휴정(淸虛堂 休靜, 1520-1604)스님이다. 서산대사는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을 간 임금 선조의 간곡한 부탁으로 70대 고령의 나이로 전국의 승려들을 독려하여 승병을 모아 평양성 탈환에 참가하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가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이후 스님은 군직을 제자인 사명당 유정(惟政), 뇌묵당 처영(處英) 등에게 맡기고 묘향산으로 들어가자, 선조 임금은 스님에게‘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존칭과 정2품 당상관의 관직을 하사하여 그 덕을 치하하였다. 1604년 스님은 세속 나이 85세에 묘향산 원적암에서 가부좌를 한 채로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묘향산의 안심사와 금강산의 유점사에 부도를 세우고, 유언에 따라 대사의 금란가사와 발우 등은 부도와 함께 두륜산 대흥사에 봉안하였다. 당대 선교 양종의 최고 고승이자 제자가 많았던 서산대사의 의발이 전해진 후 대흥사에서는 13분의 대강사와 13분의 대종사를 배출하는 등 대도량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들 스님들은 서산대사의 법맥 중 가장 손이 많은 편양 언기(鞭羊 彦機)스님과 소요 태능(逍遙 太能)계 스님들이다. 13대종사나 13대강사 중 알려진 스님으로는 13대강사 중 한 분인 혜장선사와 13대종사 중 막내로 추사 김정희와의 교유로 유명한 다성(茶聖) 초의선사 의순(意恂, 1786-1866)스님이 있다.


대둔사에 전하는 보물로는 앞에서 언급한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호)와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 응진당 앞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외에도 탑산사동종(보물 제88호), 금동관음보살좌상(보물 제1547호), 영산회상괘불탱(보물 제1552호)과 서산대사와 관련된 보물 세 점이 전한다. 즉 서산대사부도(보물 제1347호)와 서산대사의 금란가사와 염주 2종, 옥바릿대와 수저 및 선조 임금이 내린 교지를 일괄한 서산대사유물(보물 제1357호)과 서산대사가 중국 송나라 때 선문을 대표하는 네 분의 스님인 마조(馬祖), 백장(百丈), 황벽(黃蘗), 임제(臨濟)의 법문을 행서와 초서로 쓴 서첩인 서산대사 행초 정선사가록(行草精選四家錄, 보물 제1667호)이다. 평안북도의 묘향산에서 입적한 서산대사의 의발이 한반도의 땅끝에 자리한 대흥사에 어떻게 모시게 되었을까? 서산대사는 대흥사를‘만년이나 파괴되지 않을 명당’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임진왜란이나 한국전쟁 동안 대흥사에는 전혀 피해가 없었고 서산대사의 유물도 무탈하게 잘 모셔졌다. 자신의 유품을 전국 사찰에 나누어 분산한 것은 나중에라도 행여 숭유억불정책으로 말미암아 사찰과 스님들의 피해를 줄이려는 스님의 뜻이 반영된 것이다. 대흥사에 가면 승병장이자 선승이었던 서산대사의 흔적을 찾아보고, 그분의 남긴 시처럼 후대를 위한 그분의 마음을 생각해보자.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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