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두륜산 대흥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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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두륜산 대흥사 (2)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11.22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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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사찰순례(52)
서산대사(중앙)와 제자 뇌묵당(우)과 사명당(좌) 진영

해남에 있는 대흥사(대둔사)와 깊이 관련을 맺고 있는 스님을 두 분 꼽을 수 있다. 한 분은 한국 불교 법맥의 중심에서 선대와 후대를 이어준 선승(禪僧)이자 임진왜란 때 승군을 일으켜 나라를 지킨 승군장인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스님이다. 다른 한 분은 추사 김정희와 오랫동안 교유하고 우리나라 다도를 정립하여 다성(茶聖)으로 불리는 초의선사 의순(意恂, 1786-1866)스님이다. 
서산대사는 1604년 입적을 앞두고 묘향산의 암자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설법을 할 때 사명당 유정(惟政)스님과 뇌묵당 처영(處英)스님 등에게 자신이 입고 쓰던 가사와 발우를 해남 두륜산에 두라고 명했다. 당시 서산대사가 계셨던 평안북도의 묘향산에서 보면 전라남도의 해남 두륜산은 조선의 북쪽 끝에서 남쪽 끝으로 거의 이천 리나 떨어진 곳이었다. 그런 곳에 스승의 발우와 가사를 두라니 제자들은 무슨 이유인지 몰라 당황했다. 스승에게 그 까닭을 여쭈니, 서산대사는 두륜산 대흥사를 ‘삼재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요, 만세토록 파괴됨이 없는 곳이며, 종통의 소귀처(三災不入之處 萬歲不毁之處 宗統所歸之處)’이니 자신의 의발(衣鉢)을 보관할만한 곳이라고 말하였다. 1791년 대흥사 안에 서산대사를 기리는 표충사가 건립된 직후 세워진 표충사 기적비에는 이에 대해 서산대사가 대흥사가 있는 두륜산이 ‘남에는 달마산, 북에는 월출산, 서에는 선운산이 있어 자신이 마음 속으로 즐기던 곳’이기 때문에 거기에 보관하라고 했다고 쓰여 있다. 어느 말이 분명한지 알 수는 없지만 서산대사가 입적한 후 대사의 의발이 대흥사에 모셔졌고, 경내에 서산대사의 부도도 세워졌다. 그후 이전까지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대흥사는 서산대사의 생각대로 한국 불교의 ‘종통이 이어진 곳(宗統所歸之處)’으로 위상이 높아지면서 배불의 강압속에서도 13분의 대종사와 13분의 대강사가 배출되는 조선 후기의 대도량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봄, 가을에 서산대사에게 제사를 지내는 표충사


 1788년(정조 12) 천묵(天默)과 계홍(戒洪) 두 스님이 임진왜란 때 승군으로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와 두 제자 사명당 유정과 뇌묵당 처영 세 분 스님의 영정을 모시고자 당시 임금인 정조에게 상소하자, 정조는 세 분 스님의 충정을 치하하며 친히 표충사(表忠祠)라는 이름을 써서 하사하고 대사의 직계도 더 높여 추증하고 세금도 면제해 주었다. 그리고 이듬해 봄에 예조의 관리들을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정조가 금분으로 직접 써서 하사한 표충사(表忠祠)의 마지막 글자‘사(祠)’자는‘절 사(寺)’가 아니라 ‘사당 사(祠)’자이다. 대흥사 경내에 있는 표충사는 유교에서 이황이나 이이처럼 대학자들을 모셔서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는 서원처럼 서산대사 등 세 분의 스님에게 제향하는 사당이다. 한글로 보면 같은 이름인 밀양에 있는 표충사(表忠寺)는 사명대사를 추모하게 위해 만든 표충서원(表忠書院, 또는 表忠祠)이었는데, 사당을 절에서 관리해서 서원과‘사당 사(祠)’자가‘절 사(寺)자’로 바꿔진 것이다. 밀양 표충사는 사명대사가 중심이고 그 좌우에 서산대사와 기허당 영규(靈圭)대사를 모신 곳이고 대흥사보다 훨씬 이전에 만들어졌다. 대흥사 표충사를 세운 천묵(天默)과 계홍(戒洪) 스님은 아마도 대흥사에 서산대사의 의발이 전하는데 서산대사가 그의 제자인 사명대사처럼 기려지지 않는 것이 안타까워 상소를 올린 것으로 여겨진다. 숭유억불의 시대여도 선조임금이 직접 내린 교지가 있고, 임진왜란 때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것을 기리는 것을 유학자들도 반대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기존에 표충사가 있었는데 정조대왕이 서산대사의 사당을 사명대사의 사당과 같은 이름으로 붙인 것은 스승과 제자가 함께 나라에 충성한 것을 기리는 특전이었다고 기적비는 전한다. 어쩌면 묘향산에서 이천리나 떨어진 대흥사에 자신의 의발을 보관하라고 한 이유가 이처럼 억압의 시대에도 불교가 유구히 이어지라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두 곳의 표충사에서 봄, 가을에 제향을 올릴 때는 인근의 관리들이 제수를 마련해서 올렸다. 
대흥사는 서산대사가 일찍이 만세토록 파괴됨이 없는 곳이라고 예언했듯이 임진왜란, 병자호란은 물론 일제강점기를 지나 6.25 한국전쟁에도 전혀 피해가 없었다. 대흥사에서 내려오는 계곡을 끼고 기기묘묘한 모습을 자랑하는 아름드리의 벗나무, 느티나무, 참나무, 단풍나무와 그 사이 드믄드믄 하늘로 치솟은 적송이 만들어내는 울창한 숲길을 걷노라면 저절로 흥이 나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그런 길을 20여분 걸으면 피안교와 일주문이 나온다. 하지만 아직도 대흥사는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고 길가 부도밭에 서있는 50여기의 부도들을 통해 사찰이 가까워졌음을 짐작할 뿐이다. 부도밭을 지나 해탈문을 지나면 비로소 산속 깊이 꼭꼭 숨었던 대흥사가 눈앞에 펼쳐진다. 하지만 대개 오래된 큰 절에서 한눈으로 절 전체의 모습을 조망할 수 있었던과 달리 크고 작은 건물들이 좌우로 늘어서 있지만 어디가 중심인지 한눈에 잡히지 않는다. 절집들이 많은 탓도 있지만 낮은 돌담으로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다. 중앙을 가르는 개울 금당천이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한 북원과 천불전이 있는 남원으로 나누고, 남원에 다시 별원으로 표충사 구역과 대광명전 구역이 있어서 모두 네 구역으로 나눠진다. 게다가 각 구역이 돌담으로 둘려져 있어 독립된 공간처럼 보인다.  
서산대사의 사당인 표충사는 남원의 담장을 끼고 초의선사가 만들었다는 연못 무염지를 지나 왼쪽으로 돌면 나온다. 사내에서 가장 넓은 공간인 보현전과 문수전이 있는 곳에서 보면 문수전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정문인 호국문을 지나면 맨 먼저 마주치는 누각이 의중당(義重堂)이다. 이 건물은 봄, 가을 두 번 올리는 서산대사의 제사에 인근 6군의 군수가 가지고 온 제물을 차리는 곳이다. 의중당을 지나 내삼문인 예제문(禮齋門) 안으로 들어가면 북원의 대웅전과 마주 보는 위치에 자리한 표충사가 나온다. 표충사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아담한 건물로 안에는 중앙에 서산대사의 영정을, 그 좌우에 사명당과 뇌묵당의 초상화를 봉안하고 있다. 
서산대사와 관련된 유물들은 표충사 구역 서쪽에 있는 성보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성보박물관은 본관과 좌우에 서산대사유물을 전시한 서산관, 초의선사의 유물을 전시한 초의관으로 이루어졌다. 서산관에는 서산대사에게 도총섭이라는 직책을 내린 선조와 정조의 교지(보물 1357호)와 서산대사의 친필 정선사가록(精選四家錄), 선조대왕이 하사한 금란가사와 바릿대 등 유물(보물 1667호)은 물론 승병 활동 때 사용했던 승군단 표지와 소라 나팔, 금 병풍 등이 전시되고 있다.       
대흥사에 가면 표충사와 서산관에 들러 조선시대 불교의 중흥조인 서산대사의 흔적을 찾아보고, 그분이 대흥사에 의발을 전한 이유를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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